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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22. 2021

[사우디 이야기 67] 원자력 시장

사우디 이야기 (67)

1980년 졸업하고 한국지질자원연구소(당시 자원개발연구소)에 입사해 첫 번째로 출장 나간 곳이 월성원자력발전소 후속기(2ㆍ3ㆍ4호기) 부지평가 현장이었다. 연구소에서 삼 년 남짓 근무하면서 영광ㆍ울진ㆍ산포ㆍ부안 원전 후보부지에 대한 지반평가에 참여했고 마지막으로 신안군 압해도 송공리에 대한 후보부지 지반평가 사업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지금 회사로 옮겼다. 옮기고 나서 거제도 지하석유저장기지 감리단으로 파견 나갔는데, 두 해를 채우기 전에 원전 지반평가 사업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본사로 복귀했다. 그 후로 사우디에서 이제나저제나 원전사업이 시작될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지금까지 40년 넘게 이 시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리를 시작으로 월성ㆍ영광ㆍ울진에 원전이 건설되어 운영 중에 있다. 원전은 각 호기별ㆍ단계별로 지반평가를 하기 때문에 원전은 네 곳에 불과하지만 참여한 사업은 수십 개에 이른다. 사우디에 부임할 때까지 운영되고 있거나 건설 중 또는 건설이 확정된 원자로가 모두 32기였는데, 그 중 고리 원전 1-4호기와 월성 원전 1호기를 뺀 원자로 27기 지반평가에 참여했다. (고리 4기, 신고리 6기, 월성 4기, 신월성 2기, 영광 6기, 울진 6기, 신울진 4기. 산포ㆍ부안은 평가만 하고 건설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고리원전 1-4호기와 월성원전 1호기 지반평가는 대학 졸업하기 전에 이루어졌으니, 결국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지반평가에 참여한 셈이다.


<한국에 가동ㆍ건설 중인 원전. 이 중 월성 1호기는 폐쇄되었다>


사우디 현지법인에 부임한 이듬해인 2010년에 원자력발전을 담당할 왕립원자력신재생에너지원(KACARE, King Abdullah City for Atomic and Renewable Energy)이 설립되었다. 산유국이라고 해도 석유가 무한정 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길게는 석유 이후의 미래에 대비하고 당장은 늘어나는 석유 내수소비량을 줄여 석유 수출량을 유지해야 할 것이니 언젠가 원자력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는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시동이 걸려서 한동안 매우 고무되었다.


2011년 KACARE에서 사우디 전역을 대상으로 원전 후보부지를 선정하기 위한 용역을 발주했다. 우리가 수행한 지반평가는 후보부지 평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초청 대상에 들지도 않기 때문에 초청 대상에 든 한국전력기술의 협력사로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발맞춰 한국전력기술에서도 리야드에 지사를 설치하고 활발하게 영업을 전개했다. 당시의 후보부지 선정용역은 아쉽게도 Worley Parsons에게 돌아갔고, 용역 결과 선정된 후보부지 여섯 곳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여섯 곳을 다 알지 못한다.)


후보부지 선정이 끝났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KACARE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접촉 창구조차 찾지 못했다. 오직 거기만 바라보고 지사를 개설한 한국전력기술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지사장은 철수하고 아부다비 지사에서 리야드 지사를 병합 운영하게 되었다.


2015년 3월 국빈 방문에 맞춰 합작법인에서 추진하던 사업의 양해각서 체결을 의제에 넣으려고 대사관과 협의하던 중에 스마트원전에 대한 양해각서 체결이 의제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추진하던 사업은 준비가 미흡해 무산되었지만 전혀 이야기가 없었던 스마트원전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에 적잖게 놀랐고,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풀었다. 원전 건설을 위해서는 우리 전문분야인 부지평가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수행경험도 뒤질 일이 없고 더구나 몇 년 동안 현지에서 함께 일해야 할 업체들에 대한 네트워크도 이미 갖춰놓았기 때문이었다.


국빈 방문 몇 달 후인 2015년 9월 KACARE와 한국원자력연구소 사이에 3년짜리 스마트원전 설계용역이 체결되었다. 전체 설계비는 1억3천만 달러로 이 중 1억 달러는 KACARE에서 3천만 달러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부담하며, 건설이 끝나면 스마트원전 모델을 양국이 공동으로 중동 국가에 수출하는 조건이었다. (스마트원전은 100MW 용량으로 기존 원전과 달리 전체 기능을 하나의 모듈에 넣은 소형원전이다. 한국형 표준원전은 용량이 1,400MW이다.) 이 사업과 별개로 사업관리를 담당할 KACARE 요원 40명을 한국에서 3년 동안 훈련시키는 계획도 함께 추진되었다.


<스마트원전 개념도>


스마트원전과 대형원전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지만 원전 허가를 얻기 위한 절차는 동일할 텐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3년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기간이었다. 염려했던 대로 일단 시간이 걸리는 부지선정과 지반평가 작업은 뒤로 미루고 설계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스마트원전은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라이선스를 얻은 모델이었다. 하지만 물로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 방식이어서 사막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공기로 식히는 방식으로 설계를 변경해야 했고, 이에 따라 라이선스도 다시 얻어야 했다. 그래서 당초 계획을 수정해 일단은 냉각수 방식으로 건설하고 공기냉각방식 설계변경을 병행하기로 했다.


역시나 설계가 당초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지선정은 미뤄진 게 아니라 아예 최종 보고서에서 빼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렇다면 설계만 하고 마치겠다는 말인가 싶어 의아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대사관에서 KACARE 인사들을 초청해 우리 기업인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원자력국장을 만났고 며칠 후 면담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직접 KACARE와 일할 경우는 생기지 않겠지만 우리 경험과 기술력을 알려놓으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2017년 3월쯤 KACARE에서 불러서 들어가니 부지선정을 위한 약식 타당성평가를 요청하며 견적을 제출해달라고 했다. 뭔가 진전이 생겼던 모양이다. 우리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한국전력기술과 협의해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하고 한국전력기술과 사업 주체인 원자력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후보부지를 답사했다. 당장 몇 달 안에 보고서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해 서둘러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그 후로 진행되는 것도 없고 연락마저 제대로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인가 대형원전 2기를 건설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 후로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된 것처럼 KACARE에서 한국을 비롯해 미국ㆍ프랑스ㆍ러시아ㆍ중국 5개국을 입찰에 초청했다. 이 중 1차 제안서를 받아 2-3개국을 선정한 후 선정된 국가에서 각각 원전 설계를 시행하고, 설계 내용을 평가해 최종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으로 인해 세계 원자력계가 발칵 뒤집혔다. 800억 달러를 들여 원전 16기를 건설하는 사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에는 선정된 2-3개국이 모두 설계를 수행하고 설계비를 지급하겠다는 발표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수긍을 했다. 끝까지 경쟁을 붙여놓을수록 사업비가 줄어들 것이니 그에 비하면 설계비를 2중 3중으로 지급하는 게 문제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그보다 한 발 더 나갔다. 5개국을 모두 통과시킨 것이었다. 그 발표를 보고 이들의 장삿속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고삐를 조이겠다는 결정이었으니 말이다.


<KACARE 원전사업 추진계획. 이 계획대로라면 원전건설은 2020년 말에 시작되었어야 했다>


대형원전 건설계획 발표를 듣고 스마트원전은 중단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KACARE의 역량은 스마트원전 하나 제대로 감당할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대형원전이 발주되었으니 두 사업을 병행하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KACARE에서 요청했던 스마트원전 부지 약식 타당성평가는 실무자 선에서 기존 스마트원전 설계계약의 부대계약으로 처리하기로 합의해 계약서까지 작성했지만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물론 무산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건 아니다. 여기서는 사업이 취소될 경우 설령 입찰까지 마친 일이라고 해도 아무런 통보를 해주지 않는다.)


2017년 9월 5개국을 초청하는 것으로 걸음을 뗀 대형원전 사업은 2018년 말까지 사업자 선정을 마쳐야 했다. 2018년 말 이후에 몇 차례 사업자 선정이 늦어진다는 발표가 났고 2019년 후반부터는 아예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 전 대사관 행사에서 관련사 책임자를 만나 물어보니 아직 그 상태라고 한다. 예정했던 시점이 지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그렇기는 해도 어느 날 벼락같이 사업을 재개한다는 공고가 날 수도 있는 곳이 사우디이다.


대형원전 사업이 재개되고 한국이 사업자로 선정된다고 해도 이젠 내게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한국과 달리 KACARE는 부지선정에 원전사업자가 참여하는 게 이해충돌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부지선정에 참여할 길을 아예 봉쇄했다. (사우디로서는 원전사업자가 사우디에 유리한 위치가 아니라 원전사업자에게 유리한 부지를 선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부지선정에 참여하는 길은 원전사업자의 구성원인 한국전력기술의 협력업체로 참여하는 길 뿐인데 그 길이 막혔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물론 건설 과정에 여러 차례 부지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때는 원전사업자가 부지평가 업체를 선정하니 기회가 올 수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빨라야 4-5년이고 그때면 나는 이미 일흔을 넘기게 되니 이래저래 그림의 떡이 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꼭 우리나라에서 대형원전 사업을 맡게 되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우리나라 단독으로 사업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우디 정부로서는 원전 건설에 필요한 800억 달러를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고 (돈 생길 곳은 한정되었는데 쓰겠다는 곳은 어마어마하다) 이미 화력발전소는 전부 민간투자 사업으로 전환되었으니 대형원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발주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국형 대형원전 모델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미국이 사업에 참여하지도 못하면서 순순히 승인할 리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시중에 한국ㆍ미국ㆍ아랍에미리트가 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회자되고 있다. 요즘은 아부다비 왕세자와 사우디 왕세자 사이가 전 같지는 않다지만 며칠 전에 반바지 차림으로 휴양지에서 회담하는 사진도 올라왔고, 무엇보다 우리가 건설한 아부다비 원전이 잘 운영되고 있는데다가, 사우디와 달리 자금이 든든하니 투자자로 그만한 나라가 없다. 거기에 미국의 승인도 필수조건이고. 그럴 경우 우리 몫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어쩌면 알짜배기는 미국이 가져가고 우리는 껍데기만 가져오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렵게 키워놓은 원전산업의 명맥은 일단 이어놓아야 하니 사실 단맛 쓴맛 가릴 계제가 아니다.


그나저나 KACARE에서 하도 다그쳐서 계약도 하기 전에 스마트원전 부지 타당성평가 보고서를 거의 다 쓰다시피 했는데 계약도 안 되고 언제 재개된다는 말마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니 그냥 헛심만 쓴 것 같다. 사우디 재정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고, 몇 년이 지나도록 KACARE 역량이 향상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사우디 정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마어마한 사업계획을 발표한다. 지금으로서는 대형원전이건 스마트원전이건 언제 재개가 될지 과연 재개되기는 할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이다. 그렇기는 해도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나라이니 다음 달쯤, 내년 초쯤 재개하겠다고 선언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내일 아침 신문을 눈여겨 보아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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