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Sep 30. 2021

[사우디 이야기 69] 합작법인

사우디 이야기 (69)

부임할 때 회장실로부터 받은 첫 번째 지시는 설립하지도 않은 법인을 해체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몇 달 앞서 서명한 합작법인 협약서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중동본부장으로 사우디에서 십 년 넘게 근무하신 회장께서 협약서를 보고 아무리 사우디 정서를 감안한다 해도 지나치게 불공정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협약서 문안이 확정된 이후에 합류한데다가 사우디는커녕 해외근무 한 번 한 적 없는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그 후로 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아직도 사우디에서 버티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독점권(exclusivity) 조항이었다. 우리가 사우디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합작법인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니 결국 사우디에서는 파트너(사우디 측)의 동의 없이 우리가 독립적으로 영업을 할 수 없도록 묶어놓은 것이다. 그나마 독점권이 쌍방 모두 적용되었으면 모르겠는데 파트너는 우리 아닌 다른 한국기업과 협력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당시 파트너는 우리가 참여하고 싶은 대형 계약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계약에까지 이른 건 아니었고 발주처의 내락을 받은 상태였다.) 계약 내용을 보고 몸이 닳은 건 우리였고, 그 사업을 가져올 수 있다면 독점권 조항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점권 조항만 떼어놓고 보면 불평등 협약인 건 분명하다. 이 때문에 본사가 사우디 다른 사업에 참여할 여지가 봉쇄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사에서 사우디 다른 기업과 함께 일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결실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이 성사될 단계에 이르면 그때 가서 독점권 조항에 대해 파트너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일방적인 독점권 조항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주변에서 합작법인을 추진하는 사례를 몇 번 지켜봤는데 매번 그런 문제가 불거졌고, 대부분 파트너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물론 이런 일은 영업 능력이나 자금조달 능력에서 파트너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하기는 한다.


법인 설립 문서 뿐 아니라 사우디 정부기관에 제출하는 모든 문서는 아랍어 작성이 원칙이다. 합작법인을 설립하기 위해 양측이 합의한 협약서는 대개 영어로 작성하지만 (한국-사우디 합작법인 협약서를 아랍어로 작성한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부기관에는 아랍어로 작성한 문서를 제출한다. 문제는 이 문서가 영문 협약서 내용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인 설립은 절차에 익숙한 파트너가 담당하게 마련이다. 이때 한국기업에 아랍어가 가능한 직원이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파트너가 제출하는 문서가 협약서 내용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원본과 번역본이 다른 걸 확인했다 하더라도 정부기관에 제출하는 양식이나 기재내용이 정해져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 딱히 반박하기도 어렵다. 내 경우 양측이 서명한 영문 정관과 사우디 상무부에 제출한 아랍어 정관이 다르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나중에 상무부에 제출하는 정관은 형식이 정해져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반박할 거리도 찾지 못했다.


파트너가 이와 같은 대관업무를 수행할 때 양측이 합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소한 절차 하나까지 합의하는 게 번거롭기 때문에 대개는 양측 공동으로 파트너 대표자에게 위임장(POA, Power of Attorney)을 발급해 법인 설립 절차를 진행하게 한다. 이때 위임 내용을 분명하게 한정해야 한다. 우리는 법인 설립 단계에서 이미 영업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법인 설립 뿐 아니라 대관업무, 영업활동, 심지어 은행계좌 운영까지 포함한 거의 전권을 위임하게 되었다.


우리는 합작법인 설립을 위해 여러 협약서를 만들었다. 주주협약서(shareholder agreement)와 정관(articles of association)을 만들었고, 우리 회사의 기술력과 실적을 공유하여야 했기 때문에 기술협력협약서(technical assistance agreement)를 별도로 만들었다. 법인을 설립하는데 1년 가까이 걸리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 법인이 설립될 때까지 합작법인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준인 잠정협약서(interim teaming agreement)도 만들었다. 은행계좌 운영(bank operation)에 대한 합의 내용을 포함해 몇몇 세부적인 기준은 주주결의(board resolution)로 대체했다. 주주결의로 수립한 운영기준은 현지에 부임한 이후 확정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개진했다. 그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졌고, 상당 기간 서먹서먹하게 보내야 했다.


법인 설립 이후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하면서 사우디 사람들이 돈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걸 여러 차례 경험했다. ‘아랍 상인’이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싶었다. 은행계좌 운영 기준을 합의하는데 마지막까지 ‘서명권자’가 문제가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금 집행에 간여하지 못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계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서명권자’를 다수 지명하고 그 중에 몇 명 이상이 연서명해야 인출이나 이체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경우 반드시 양쪽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넣자고 요구했다. 꽤 오랜 시간 대치했지만 결국은 내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우리는 당장 계약을 하고 사업을 수행하는데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후일 심각한 문제로 비화될 여지가 있는 여러 조건에 대해 매우 안이하게 대응했다. 사실 이런 조건이라면 파트너가 악의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법인을 운영하더라도 통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이 지금까지 파트너가 신의를 잘 지켜서 큰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신의를 깰만한 큰 이권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당초에 기대했던 대로 큰 수익이 발생했다면, 그래서 신의를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오류를 범했거나 간과했던 몇 가지 문제점과 그에 대한 대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모름지기 협약서라면 골격에 먼저 합의하고 그 골격을 바탕으로 조문을 확정해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는 파트너가 제시한 협약서 초안을 받아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확정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파트너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묶여 우리의 주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답은 A인데 문제지의 보기는 B와 C뿐인 셈이었고, 결국 그중에서 답을 골라야 했다. 나중에 보니 그런 고도의 전략으로 우리에게 초안을 제시한 건 아니었고 그동안 다른 회사와 합작할 때 사용한 틀을 그대로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관철해야 할 조건이다. 물론 우리가 초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 의도대로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아마 이쪽에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독점권을 요구한다고 해서 불공평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결혼한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지 못하도록 이를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두자고 요구하는 걸 무리하다고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합작법인이 결혼과 다른 것은 ‘완전한 결합’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합작 목적을 명확히 제시하고 그 목적에 해당하는 분야에 대해 양측이 함께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만든다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합작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도 아니고 합작 분야가 증감될 수도 있으니 명확한 부분만 언급하고 필요에 따라 증감하는 절차를 명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협약서는 가급적 법인 설립을 위해 정부에 제출하는 문서의 내용과 형식을 따르는 것이 좋다. 정관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우디에서 적용하는 형식을 따르고 미진한 부분은 보완하는 정도가 현실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정관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건 양측이 소송을 벌이거나 법인을 청산할 경우일 텐데, 이때 아랍어 정관이 영문 협약서와 다르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아랍어 문서가 다른 언어로 작성된 문서와 다를 경우 아랍어 문서가 우선한다.”


은행계좌 운영권한을 파트너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로 인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합작법인을 세운 목적이 사업 이익을 얻는데 있는 게 아니라 현지법인을 사업 수주 창구로 활용하고 실제 업무는 한국 본사에서 수행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본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주한 금액 중 얼마를 본사 몫으로 받아갈 수 있느냐 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계좌 운영권은 다른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카드로 사용했다. 하지만 합작법인의 목적을 사업이익에 둔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주주결의로 처리할 게 아니라 협약서 작성 단계에서 확정지어야 할 사안이 아닐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우디 이야기 68] 국가 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