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론

친구를 보내며

by 박인식

고등학교 때 몸이 아파 한 학기를 휴학한 일이 있습니다. 한창 예민할 나이이니 복학해서 한 해 후배들과 친구로 지내는 일이 쉬울 리 없었고, 그래서 두 해 내내 쉬는 시간에도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그때 두 해 동안 짝이 되어 함께 자리를 지켜준 친구가 있습니다. 같은 대학 같은 과로 진학했습니다. 그 친구나 저나 전공했던 분야에서 일했으니 은퇴할 때까지 같은 업계에서 밥을 먹고 산 셈이지요. 1972년 짝으로 만나 오십 년을 지척에서 지낸 친구가 오늘 아침에 별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공부 못한다고 저를 꽤나 구박했습니다. 너는 그렇게 공부를 잘 해서 같은 과에 들어왔냐고 면박을 주기는 했지만, 대학에서도 그는 저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습니다. 제가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를 더 다니는 동안 그는 교수의 총애를 받으며 대학원 공부를 했고, 공기업에 들어가 중역으로 은퇴할 때까지 성실의 표본으로 살았습니다. 공부와는 담쌓고 놀기 좋아하던 저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직장인이 되고 어쩌다 보니 업계에서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는데, 그런 제 모습을 누구보다 기뻐한 게 그였습니다. 그렇기는 했어도 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공부도 지지리 못하던 게”라는 말로 시작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지요. 심지어 제 앞에서도.


대학입시 보기 며칠 전 그가 맹장수술을 해서 시험 당일 내내 부축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수험번호도 바로 제 뒷번이었습니다. 그가 결혼할 때 함도 제가 지고 갔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 이골 난 악동들이었지만 한복 곱게 차려입은 새색씨에게 쪽도 못쓰고 끌려들어갔지요. 놀려 먹겠다고 노래 시켰다가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인 ‘갈까보다’를 읊는 모습에 입만 벌리고 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작년 이맘때 항암치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시경 검사가 귀찮아 이리저리 미루다 사단이 났답니다. 한 주 걸러 한 번씩, 그렇게 열두 번을 치료 받아야 한 사이클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병원 가는 날짜를 적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치료 끝날 때쯤 전화해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언제나 씩씩했고 밝았습니다. 증상을 느껴서 알 정도였으니 병이 이미 깊어진 것이지만, 그라면 잘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한참 쉬었다가 두 번째 사이클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졌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사이클을 시작은 했지만 마치지를 못했습니다. 몸이 이기지 못하니 기력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중단했답니다.


아픈 사람에겐 전화도 짐이 될까 싶어 한 달에 두 번 날을 정해놓고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달에 전화하니 받지를 않더군요. 몇 시간 지난 후 치료 받느라고 전화를 못 받았다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호흡이 어렵다고 뭔가 몸에 부착했다던 그게 탈이 났던 모양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잠깐 병원에 간 줄 알았더니 아예 입원을 한 거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돌이켜보니 언제부턴가 그의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고통 없이 마지막을 잘 견뎌내기를 기도하고 있었더군요. 아마 항암 치료를 중단했을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엊그제 문자를 보내니 대답이 없었습니다. 몇 시간 기다리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이 문자를 보내왔더군요. 제게서 전화가 왔다니 그냥 두라고 하더랍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 나기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고통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별 고통 없이 편안하게 떠났다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그 친구 이름으로.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는군요. 엊그제 통화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가도 힘들게 하지 않기를 잘했다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오래 전 새색씨가 짓궂은 함진아비들에게 불러줬던 춘향가 한 대목이 떠오르네요.


♣♣♣


갈까보다 갈까보네 임을 따라서 갈까보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 나는 가지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모두 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

우리 님이 왔다하면 나는 발 벗고 아니 쉬어 넘으련만

어찌하여 못 가는고


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일도 보건만은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슨 물이 막혔건 데 이다지도 못 오시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UI1bgtfCt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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