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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9. 2021

누울래? 일어날래? 괜찮아? 밥 먹자

그동안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이영미

정한책방

2021년 3월


2017년 여름쯤 가까운 분의 페북을 드나들다가 루게릭 투병기를 올리는 저자를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 ‘뿌리 깊은 나무’에서 북 디자인을 담당했었다는 저자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뿌리 깊은 나무’와 그 잡지가 폐간되고 나서 창간되었던 ‘샘이 깊은 물’의 독자로서 가졌던 폐간의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그 글을 읽은 저자가 이 잡지들을 이끌었던 한창기 사장에 대해 59인이 쓴 ‘특집 한창기’라는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국내에 있었다면 염치불구하고 받았을 것이지만 외국까지 보내는 수고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댓글의 말미에 ‘뿌리 깊은 나무’를 만든 분들은 생각이 반듯하지만 조금은 까탈스럽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노라면서 저자도 그렇지 않은지 물었다. 물론 웃자는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그런 농담이 자연스러웠다. 저자는 일에 대해서는 까탈스럽지만 인간관계는 부드럽다고 했다. 일에 까탈스러운 사람이 부드럽기가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저 웃고 넘겼는데, 이 책 곳곳에 저자가 일처리 솜씨와는 달리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했다는 지인의 고백을 들으며 조금 민망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었지만 저자와는 맞닿는 곳이 많았다. 저자 또한 내 평생의 스승이신 이재철 목사님과 인연이 남달랐다. 자연스럽게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신앙적인 물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 끝에 저자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고 4년이 넘은 오늘까지 기도할 때마다 저자를 빼놓지 않는다. 저자를 위해 기도는 했는데 돌이켜보니 나를 위한 기도였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죽음을 당면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고통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현대 의학으로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저자의 치유를 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하루라도 고통을 줄여주시기를 구했다. 하지만 생명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기도로 합당한 것인지 혼란스러웠고, 지금도 갈팡질팡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병을 얻고 난 후 무엇보다 43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계신 엄마가 무거웠다고 고백한다. 누워계신 동안 고비마다 엄마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저자는 병을 얻고 난 후 엄마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잠시 서울에 올라와 있는 동안 자기가 오기를 기다린 듯 엄마가 돌아가시자 불사신 같던 엄마를 자기가 병들자 데려가셨다며 ‘드디어’ 해방된 엄마를 마음속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장례의 모든 과정을 자기 죽음으로 묵상하며 어이없게도 죽음을 소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2018년 봄에 들어서면서 저자의 글이 부쩍 줄어들었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어느 날 손가락으로 몇 글자 쓰면 힘이 빠져서 음성으로 글을 쓴다면서 요새는 발음이 안 좋아져서 수정을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여름에 들어서자 가족 도움 없이는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며칠 후 “마음은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저자의 글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상황을 알지 못하면 기도가 참 막막해진다. 답답한 마음에 2019년 연말 쯤 저자가 출석하는 교회에 메일을 보내 근황을 알려주시기를 부탁했다. 송구스럽게도 담임목사께서 심방 다녀오셨다며 답신을 주셨다. 이미 호흡이 어렵게 되었는데도 의식은 또렷해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얼마 후 지인께서 저자가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상황이 닥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인위적인 생명 유지 장치를 거부합니다. 생명을 경시해서가 아니고 인생에 아무 아쉬움도 여한도 없어 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나 또한 생명유지 장치를 쓰지 않겠노라 마음먹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처럼 아무런 아쉬움도 여한도 없어서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그 글을 쓰기 며칠 전 “일 분에 열 몇 번 굳이 애쓰지 않아도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쉬는 것은 정말 대한한 일이구나”고 고백한다. 의식하지 못한 채 숨을 들이 쉬고 내쉬는 것조차 대단한 일이라고 느끼는 상황에서 저자는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의학의 힘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내려놓은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거두어가시기를 구한 것일까? 내가 그 상황에 처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마음먹은 것과 달리 어떻게 서든 회복을 구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는 병이 나고 나서야 마음이 고요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그동안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부질없는 것을 붙들고 싸움하는 어리석은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욥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불의함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향하게 된다면서 고난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의미가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자 희망임을 깨닫는다고 고백한다.


십 년 넘게 내 땅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을 소명으로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방인으로 사는 고단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변변히 이루지 못했으니 낙심이 크다. 나도 저자처럼 시간이 지나면 이런 낙심이 부질없는 일로 여길 수도 있을까? 고난에 대해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소망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힘겨워지자 그동안 전문가로서 가져왔던 북 디자인의 개념을 수정한다.


“책을 만들 때 고려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표지 디자인과 내지의 마진, 타이포 디자인뿐만 아니라 판형, 종이, 두께, 인쇄, 제본방법까지. 손힘이 약해 이제 무거운 책, 가벼운 책, 두꺼운 책, 얇은 책 할 것 없이 스스로 넘길 수 없게 되다 보니 잘 펴지고 잘 넘어가는 책이 나에겐 최고의 책이다. 눈에 보이는 산뜻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책은 잘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의 책을 펴내면서 책이 완전히 펴지는 사철 제본 방식을 택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는 이미 공개한 글을 어떻게 엮었을지 궁금했는데, 받아들고 나니 그가 북 디자이너였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책 말미에 북 디자이너가 책을 만든 과정을 소상히 적었다. 편집에 관련된 책에 그런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온 동안 처음 대하는 모습이었다.


“책의 앞표지는 버밀리언 뒷표지는 올리브, 상반된 색으로 한다. 한 가지 색으로는 몸은 매였으나 벼린 정신의 이영미를 드러내기에 부족했다. 이영미가 찍은 겨울 궁남지 사진을 띠지의 바탕으로 썼다. 수분 마른 연잎대가 뚫린 듯 막힌 듯 그가 겪어온 지난 5년의 ‘숨과 근육의 기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제본은 책이 완전히 펴지는 사철 제본 방식을 선택하였다. ‘잘 펴지고 잘 넘어가 (몸이 불편한 사람도) 편하게 일을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책은 잘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영미의 토로를 새겼다.”


저자가 직접 책을 디자인 했을 리 없고 그 글도 저자가 쓴 것이 아니겠지만 저자가 쓴 글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하지 못할 정도로 그 글에서 저자의 체취와 감각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랫동안 그와 호흡을 같이했거나 직접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동료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한 가지 색으로는 몸은 매었으나 벼린 정신의 저자를 드러내기에 부족하다”고 말하고 스스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책은 잘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저자의 토로를 새겼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나 북 디자이너의 말대로 이 책 어느 장을 펼쳐도 책장이 넘어갈까 붙들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독특하게도 이 책은 책등은 가리지 않고 제본 그대로 드러내었다. 앞장과 뒷장의 색깔이 다르고 책등을 드러낸 독특함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소장할 가치가 있겠다.


책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은 곳에 사는지라 대부분 전자책으로 읽는다. 저자가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보니 전자책까지 발간할 것 같지 않겠다 싶어 기다리지 않고 종이책을 인편에 받기로 했다. 이곳은 코로나의 여파로 아직도 왕래가 자유롭지 않아서 3월 발간되었을 때 바로 샀는데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손에 넣었다. 읽고 나서 보니 전자책으로 읽었다면 북 디자이너인 저자가 표지 하나 띠지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겠다 싶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아니, 전자책의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전자책을 발간하겠다는 걸 북 디자이너인 저자가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자책으로는 도저히 저자의 감각을 드러낼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저자가 더 이상 페북에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된 이후로도 글이 몇 번 올라온 일이 있다. 아마 뒤늦게 얻어 더욱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발병 이후 저자의 손과 발이 되었던 작은 아들 진세호의 손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랜 시간 거의 매일 저자를 기억하고 기도하는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저자에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색을 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자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그렇다. 아마 작은 아들이 이 글을 읽지 않을까 싶은데, 이 글을 읽는다 해도 저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엄마의 손발이 되어준 작은 아들의 수고에, 그리고 그의 음악작업에 작은 응원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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