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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28. 2021

<소설> 빛 속으로

적의 언어로 쓰다

김사량

김석희 번역

녹색광선

2021년 8월


나는 소설을 이야기로서 읽는다. 소설을 이야기로만 읽다 보니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지 짐작할 뿐이다. 때로 인상적인 표현이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작중 인물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그 의미를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짧은 분량으로 작가의 의도를 담아내는 단편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번에 출간된 김사량의 소설집은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아 소설보다도 그 소설의 배경과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한 해설을 먼저 접하고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종이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 김사량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광복 이후에는 월북해 작가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한동안 남과 북에서 모두 완벽하게 지워졌다고 한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는 서문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박제가 되어버린’ 김사량의 작품은 1940년대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대적 정서의 보이고 있으며, 작가 스스로 ‘적의 언어’로 글을 쓰는 고뇌를 작품에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십 년 넘게 남의 땅에서 남의 말을 쓰며 살아왔다. 작가처럼 나라를 빼앗겨서가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 내가 선택한 결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을 쓰지 못하는 삶이 답답하지 않고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살아보니 내 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말의 뉘앙스 속에 감춰져 있는 발톱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수없이 겪었고, 그러면서 언어가 힘이고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사량 연구자인 경희대학교 김석희 교수는 일곱 차례에 걸친 김사량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에서 소설의 주제가 언어 자체에서 이름으로, 아이덴티티로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아이덴티티를 감추거나 애써 감춘 아이덴티티가 누군가에 의해 드러났을 때 주인공이 느꼈을 심리적 갈등과 충격을 세밀하게 살핀다. 심지어 타의에 의해 아이덴티티가 드러난 것을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상황에 비유하기도 한다.


<빛 속으로>에서는 조선인의 외관을 갖춘 주인공이 일본에서 굳이 자신의 언어를 드러내지 않고 살다가 주변인에 의해 조금씩 자신의 언어가 드러나고 <천마>에서는 일본 물을 먹은 주인공이 한국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하고 <풀이 깊다>에서는 당시로서는 인텔리인 주인공이 서투른 일본어로 군민들에게 자기를 과시하려는 군수인 숙부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사량 연구자인 역자가 해설에서 밝힌 것이나 편집자가 서문에서 평가한 것처럼 여기 실린 (자전적 소설인 <노마만리>는 제외한) 소설 세 편이 모두 언어를 매개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예민하지 못한 감수성으로는 역자나 편집자가 지적한 바와 같은 언어에서 이름으로, 아이덴티티로 확장되어나가는 주제나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구조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 ‘1940년대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대적 정서’를 읽어냈는지도 찾을 수 없었다. 책 읽기에 앞서 해설을 대하면서 기대하게 되었던 (비록 적의 언어는 아닐지라도) 타국어를 쓸 수밖에 없는 이방인의 고단함에 대한 표현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을 이야기로 읽는 내게는 <풀이 깊다>가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이름이 나와 같아서 이야기에 좀 더 쉽게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고 선친의 고향 (삼척)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는 해도 이야기가 비교적 구체적이고 그래서인지 주인공에 좀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된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지금 상황에 맞춰 각색한다고 해도 2021년 가을에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 하는 자들과 그들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만 그를 바꾸기 위해 결과적으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일상으로 돌아가는 지식인의 모습. 그런 면에서 ‘현대적 정서’를 말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역자는 <풀이 깊다>에서 코풀이 선생의 아내가 코풀이 선생을 내쫒으며 퍼부어대는 것을 강원도 사투리로 표현한다. (억세 빠진 삼척의 내 사촌 누이들이 늘 쓰던 말이어서 몇 번을 되풀이해 읽었다.) 역자는 강원도 사람들이 분명하고 자신이 강원도 평창 출신이어서 자연히 그렇게 표현했노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자의 고향을 알고 있으니 그 설명이 쉽게 이해는 가는데, 그리고 그것이 내 선친의 고향 말이니 더욱 정감이 가기는 하는데, 역자의 번역 후기를 읽고 <풀이 깊다>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등장인물들이 강원도 사람이라고 특정 지을만한 표현이 없었다. 혹시 심심산골이면 모두 강원도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모르겠다. 산골로 치자면 청송ㆍ영양ㆍ봉화가 더 깊은데.


김사량은 이 작품의 역자이자 김사량 연구로 석사와 박사를 마친 김석희 교수의 글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지만 스스로를 김사량 연구자로 부르는 역자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궁금함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내게는 낯설고 조금은 어려운 글이어서 앞으로 쉬이 손길이 가지는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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