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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24. 2021

오래된 유럽

기자 출신 이주민의 유럽 읽기

김진경

메디치미디어

2021년 11월 15일


어쩌다 보니 부자가 모두 십 년 넘게 다른 나라의 선의에 기대어 살고 있다. 나는 사우디 현지법인에서, 아들은 독일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일한다. 남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나는 이방인이기는 하지만 워낙 외국인이 많은 나라인데다가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은 편이어서 다소 불편하기는 했어도 차별받는 느낌이 든 적은 없다. 아들은 선진국에서 영주권자로 살아가고 있으니 차별을 경험했을 만도 한데, 그들이 고급문화로 여기는 오페라에 종사하고 있어서 그런지 크게 차별을 느끼지 않고 산다. 물론 사소한, 때로는 은연중에 차별을 의식하기는 한다.


저자는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취리히에서 스페인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며 산다. 현재 취리히 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유럽 이야기를 읽으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에 공감한 일도 많고 사회현상에 깔려있는 문화적 배경을 읽어내는 통찰력에 감탄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의 글은 단순히 이방인의 눈에 비친 유럽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고찰인 셈이다. 그의 일상이 글에 녹아있으니 어떤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그가 기자 출신인 것은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글을 읽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고, 저자 소개를 찾아보니 기자로 일했었고, 그러면 그렇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별


이방인이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연히 차별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유럽인들의 차별은 편견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편견이 더 큰 편견으로, 그리고 차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동양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곳,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억압적인 곳, 음침하면서도 신비로운 곳으로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선이 있는데, 이는 자신을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곳으로 정의해 그렇지 못한 동양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식민주의를 합리화하려 든다는 것이다. 편견 역시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것에서 출발한 것일 테니 결국 그 말이 그 말인 셈이다.


저자는 스위스에서 바이러스 소리 들을까봐 기차 타길 망설이는 한국인인 자기 처지가 서울 홍대에서 같은 이유로 모욕당했다는 중국인의 처지와 겹쳐졌다며, 우한 교민을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아산에서 길을 막아선 이들은 이방인으로 사는 한국인들이 유럽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세대는 대체로 가부장제도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나 역시 그렇다. 그러니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발언에 대해 하나하나 잣대를 들이대는 듯한 political correctness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그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마 최근에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십 년 넘게 그런 관습을 가진 사회에서 몇 발짝 떨어져 산 것이, 또한 남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산 경험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록 크게 차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차별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작은 변화이기는 하지만 나도 몇 년 전부터 의도적으로 호칭에 여성을 표시하지 않고 있다. 3인칭 대명사는 남녀를 막론하고 ‘그’라고 표시하고 더 이상 ‘그녀’니 ‘여류작가’니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저자는 차별을 막기 위한 ‘3인칭 단수 대명사 they 쓰기 운동’이 넓게 확산되면서 영어 문법조차 바뀌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렇게 차별을 줄이고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자는 언어를 ‘포용적 언어’, ‘공정한 언어’, ‘비차별적인 언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라고 부른다고 소개한다. 저자 말대로 ‘성 중립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라고 해서 다른 노력 없이 저절로 성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은 말을 바꾸고 말은 행동을 바꾸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런 사회가 성 평등에 한 발짝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을 뭉뚱그려 ‘서구 사회’라고 부른다. 하나로 부르는 만큼 사고방식도 하나로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얼굴을 검게 칠해 흑인을 풍자하는 black facing에 대한 인식이 미국과 유럽이 꽤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우선 미국 흑인과 유럽 흑인은 가진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며, 미국은 인종차별이 백인 대 흑인의 구도로 이루어졌지만 유럽은 유럽 기독교인 대 아랍 무슬림, 부유한 북ㆍ서유럽 대 덜 부유한 동ㆍ남유럽, 유럽 대 아시아 등 여러 지역ㆍ종교ㆍ언어가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구글이 다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일이기 이전에 그것이 수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지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검색시장을 생각해보세요. 백인 남성만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게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 성별, 나이대의 사람들이 구글 검색을 통해 쇼핑하고 정보를 찾지요. 그들의 기대를 고루 만족시키지 못하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어요.” 말하자면 다문화는 단지 의무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만한 유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문화를 보호해 궁극적으로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을 이끌어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자유와 민주주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감춰져있던 각 사회의 단면이 드러나고, 그러면서 그동안 가져왔던 각 사회에 대한 이미지가 뒤집어지는 것을 적지 않게 경험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의료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오히려 마스크와 백신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세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발코니에 나와 의료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촛불을 켜고 콘서트를 열면서 연대(solidarity)를 말했지만 정부 조치를 위반하는 모임을 열었다.


저자는 ‘마스크 안 쓸 자유’, ‘봉쇄에 반대하는 시민연대’, ‘백신 맞지 않을 자유’ 같은 구호 앞에서 그간 알아온 자유와 연대의 개념이 흔들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국민투표로 상징되는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조금만 뜯어보면 이기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성숙한 개인주의’와 ‘나만 아는 이기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국민이 직접 결정한다는 것과 포퓰리즘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고 그의 시선으로 본 민주주의의 실체를 피력한다.


저자는 이 역시 우월감을 바탕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데 익숙한 유럽이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를 ‘그들만의 문제’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팬데믹 후기로 갈수록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자유가 대립할 때 어느 선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이루어진 것 자체가 유럽의 한계이자 동시에 오랜 민주주의 역사에서 나오는 저력으로 평가한다.


교육


저자는 스위스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유럽 교육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경쟁이 적고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이라는 오해는 둘째 치고 스위스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성숙한 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한 일 잘하는 시민’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 사는 내 큰손녀는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데 내년 짐나지움 진학을 앞두고 벌써부터 지원할 학교를 돌아보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짐나지움에 가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직업학교를 선택해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진로가 결정되는 것이다. 독일은 블루칼라가 대접받는 나라이고 그래서 나라 전체가 짜임새 있다고 부러워했다. 현재 독일의 교육제도가 나라 전체를 짜임새 있게 만드는 중요한 기틀이 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5학년에 진학할 아이들에게 바꾸기 어려운 진로 선택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 그러니 같은 문화권인 스위스의 교육 목표가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한 일 잘하는 시민’을 만들기 위한 것인지 저자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세상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독일의 산업이 그렇게 튼튼하고 경제 사정도 여느 유럽국가보다도 월등하게 좋다. 하지만 영주권자로 사는 내 아들 가족의 눈에 비친 독일은 완고하고 변화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산업 강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효율적인 일꾼을 기르는 것인지 성숙한 시민을 키우는 것인지 묻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효율적인 일꾼을 기르는 교육’에서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성숙한 시민을 키우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사


우리는 멀게는 일제 강점기 가깝게는 이전 정권에서 저질러진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소란스럽다. 그런 관점에서 내전과 오랜 독재가 끝난 뒤 (저자의 시댁인) 스페인 사람들이 택한 과거사 정리 방법과 유대인 핍박 이후 제정된 반 나치 법안이 크게 대조를 이룬다는 저자의 설명이 눈길을 끈다.


“스페인에서는 독재자 프랑코 사후 첫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가 이른바 망각협정을 맺고 그동안 저질러진 정치적 의도를 가진 모든 행위를 사면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가해자의 죄를 묻지 않는 법, 피해자의 망각을 강요하는 법이다. 독일은 유럽 국가 중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가장 강한 축에 속한다. 독일의 반 나치 법안은 독일 헌법에 어긋나는 단체(나치)의 상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성의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상규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진상규명을 해야 처벌을 하든지 용서하고 화해를 도모하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딛고 선 얼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건 단죄인가 아니면 용서인가. 용서할 권리를 행사하는 건 정치인들인가 아니면 피해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기자


조카 하나가 중앙일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다. 대학 다닐 때부터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에는 문체만 흉내 내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깊어지고 예리해졌다.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유럽에 살면서 유럽 이야기를 쓴 책이라고 했다. 나 역시 저자만큼 이방 땅에서 살았고 그 땅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적지 않게 썼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우니 책으로 내라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요즘 서울에 머물면서 서점에 들를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신간들을 보면서 나 하나만이라도 거기에 보태는 일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기자 출신의 저자가 쓴 이 책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감춰진 그림자마저 모두 지웠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유럽의 사회현상과 그 저변에 깔려있는 유럽인의 우월감, 거기서 출발한 편견과 모양을 달리한 혐오까지. 저자는 폭넓은 주제를 쉬운 말로, 그러나 깊이 있게 훑고 있다. 책을 단숨에 읽은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일독을 권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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