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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5. 2022

한국 기독교 흑역사

한국교회의 자화상

강성호

짓다

2016년 5월 12일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기독교인이어서 자랑스러운 때보다는 기독교인인 게 부끄러울 때가 더 많았다. 요즘 들어서는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죄인 된 마음으로 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과 관용으로부터 너무도 멀어진 교회에 몸담고 있는 죄 값이려니 한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이 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터여서 몇 년을 별렀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부끄러움이 무엇이고, 그 부끄러움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알아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지금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치부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오류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 구속, 부활과 재림,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실재, 이 다섯 가지를 진리로 여기는 믿음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런 주장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려다보니 상징과 은유를 쓸 수밖에 없었던 성경 기자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초기 선교사들이 가졌던 청교도의식, 경건주의, 부흥운동, 행동주의 유형의 복음주의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교회사(敎會史)가 호교론(護敎論)적인 관점으로 흐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사는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납북사실을 강조하는 대신 부끄러운 부일협력은 감추고, 정통성만 강조하고, 부정과 치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합리화가 앞서 자기반성의 기회를 놓쳤고, 결국 지금의 부끄러운 모습이 되었다는 말이다. 아울러 저자는 지금이라도 치부를 드러내고 원인을 규명함으로서 교회가 제자리를 찾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는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10년 전후로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920년대에 이르러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조직에는 대체로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하는데 하나는 조직의 자기 존속을 위한 ‘유지 메커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유지 메커니즘’이 강해질수록 ‘성취 메커니즘’은 후퇴해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수단이 목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유지 메커니즘’이 과잉되면서 제도화된 교회를 지키고 성장 확장하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지배체제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책의 첫 머리에서 저자가 밝힌 이런 견해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모든 치부가 여기서 비롯되었고, 시간이 가면서 치부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부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이후의 서술은 저자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현상과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한일합방 이전까지 국제여론을 의식해 선교사의 기득권을 보장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정책은 평양에서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선교사를 탄압하던 총독부는 기미독립운동 이후 선교사 회유정책으로 노선을 바꾼다. 저자는 이때 총독부가 기독교 보수화를 통해 교회를 식민지배의 한 축으로 삼으려 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총독부가 선교사들이 미션스쿨 세우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프레임을 앞세워 총독부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고, 미션스쿨은 식민지 교육체제에 귀속되었다. 이때 활동했던 스코필드 선교사는 “일선(日鮮) 공존공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온건한 사상을 가질 것”을 권고했다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조직 확장과 유지를 위해 (유지 메커니즘) 재단법인 인가를 얻고자 총독부에 협조하게 되고, 그 결과 제도적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대신 부당한 요구에 복종하기에 이른다. 부당한 요구에 복종한 것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강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목적한 것을 얻기 위한 ‘자발적인 복종’이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어느 교단에서는 평양에 신학교 설립인가를 얻기 위해 신사참배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 ‘기독교보’는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고 보국강조기간을 설정했으며, 장로교회에서는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을 기념하는 황실과 황국을 위한 기도회와 수많은 전승축하회, 무운장구 기도회를 열고 국방헌금을 주도했다. 더 아연실색할 일은 ‘장로교단 안에서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협력의 논리로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중일전쟁 시기 한국교회의 전쟁협력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1940년 제29회 총회 보고에 의하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3년에 걸쳐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 1,355회 ... 라는 실적을 냈다.” (p.49)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은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기 (1938년 9월) 전부터 벌어진 것이다. 총독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고 그때로부터 한국교회가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유지 메커니즘’을 따라 자발적으로 총독부에 협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최근까지도 교회사 연구자들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며 ‘죄를 자복한 것 같으나 교회의 자발성은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p.49의 인용부분은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사실로, 지금까지 어디서도 그런 내용을 들어보지 못했다.


저자는 이렇게 일제침략 전쟁에 협력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평화공동체로 나아가는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베트남 파병이나 이라크 파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호응하는 모습마저 보이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총독부가 ‘출애굽 저항의 서사’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치고, 한국교회는 이에 저항하지 못한 채 구약성경을 경시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현실의 불의를 비판하는 통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 서른이 넘어서일 것이다. 마흔쯤 되었을 때 구약성경이 주는 묘미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구약성경이 홀대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의문이 풀리기는 하는데 저자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가능한 추론이기는 하지만 어디서도 그런 주장을 들어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해방이 되자 한국교회 안에서 부일협력에 대한 자성의 요구가 터져 나왔지만 청산 대상을 ‘친일파와 신사참배’로 국한시킴으로서 전쟁 범죄 자체는 거론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부일협력 앞장선 목사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한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 ‘유지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제도적 교회일 뿐이다. 나 또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스스로 교회를 지켰다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들이 지켰다는 교회는 하나같이 그리스도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부일협력에 앞장 선 목사들이 말하는 제도적 교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 의해 교회가 본연의 자세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는데, 아마 이 책을 쓴 저자도 동일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그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 감히 누가 스스로 교회를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무모함에 할 말을 잃는다.


이렇게 ‘유지 메커니즘’에 의해 성장해온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자성의 시간을 가질 새도 없이 정치세력과 결탁하면서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더욱 멀어져간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목례로 바꾸고, 다른 종교는 배제한 채 군종제도를 도입하고, 국가의례를 기독교식으로 바꾸고,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정치권력에 기독교 인사를 포진시키면서 기독교 국가체제를 도모한다. 이러한 조치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낸 한국교회는 이승만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의 주체가 되고 급기야는 부정선거를 무마하는 데까지 앞장선다. 그리고 부일협력의 주축을 이루던 목사들이 다시 이 일에 앞장서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 된다.


이와 같이 정치와 결탁한 한국교회는 정부가 탈취한 일본천리교 재산을 나눠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송창근 목사의 성남교회, 김재준 목사의 경동교회, 광화문 감리교본부가 세워진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러한 결탁은 없어지지 않는다. 1967년 6월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과 대학생선교회를 이끄는 김준곤 목사는 ‘전군 신자화 운동, 국가조찬기도회, 빌리그래함 목사 초청, 대학생선교회 전도대회’에 합의한다. 1974년 대학생선교회가 주최한 엑스플로74 대회에 정부는 1만 명 성가대 좌석을 마련하고 군용 텐트와 인근의 76개 학교를 제공해 22만 명이 머물 수 있게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 집회가 친정부 행사로 변질된다. 이후 김준곤 목사는 “삼선개헌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두둔하고 나서고 대학생선교회는 정부의 도움으로 선교단체로는 유일하게 정동에 대규모 자체건물을 보유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흑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더욱 공고해진다. 저자는 교회의 분열이 부동산에 대한 집착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었고, 이의 연장선에서 교회건물의 성전화가 가속되고, 이것이 십일조를 강화하는 데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다른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고발한다. 아울러 일반기업의 비리를 뛰어넘는 기독교기업의 악행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고발한다.


나는 꼭 40년째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 책에서 교회와 정치경제권력의 유착을 설명할 때 예로 든, 직장예배의 효시인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기독교기업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일과 시작 전에 전 직원이 예배를 드린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전 직원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참석하지 않는 것이 편안하지는 않다. 경영층은 물론 경영층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급자일수록 이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경영의 투명성이 일반기업보다 못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낫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성이 더 높은 것도 아니다. 모든 행사는 예배로 시작하고, 다른 기업에서는 마이너그룹을 면하기 어려운 신우회가 주체가 되어 예배를 이끌어간다. 신우회원으로 때로는 신우회장으로 오랫동안 예배를 이끌어오면서 많은 모순과 직면하면서 몹시 고단했다. 심지어 독실한 신앙을 가진 직원이 예배 순서를 맡은 임원을 지목하며 저런 인간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분이 결코 내가 믿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예배를 거부하는 모습에 좌절하기도 했다. 성경을 경영방침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을 마주치면 도망가고 싶었다.


기독교기업 연합체를 통해 알게 된 다른 기독교기업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기업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흑역사가 기독교기업에서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책 서두에서 부산외대 이광수 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이 “방법론적으로는 비신학적 역사학적 비판이면서 시선으로는 외부자가 아닌 내부자로서 던진 비판”이라고 평가한다. 나 또한 내부자로서 저자의 비판이 몹시 아프지만 저자 역시 그만한 아픔을 감수하면서 썼을 것이고, 그의 비판은 한국교회의 회복을 소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내 자신이 ‘유지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내 자신을 발견한 것이 이 책으로부터 얻은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한국교회 회복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회복의 단초는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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