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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3. 2022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경성에서 서울로

염복규

이데아

2016년 12월


서울이 지금과 같은 현대도시의 틀을 마련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고,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할 뿐 아니라 풍수의 맥을 끊음으로서 조선 왕실의 재건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그동안 풍수의 맥을 끊을 목적으로 일본이 혈맥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알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그 쇠말뚝을 빼내는 일에 매진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2천 년대 들어오면서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박아놓았다는 쇠말뚝이 사실은 측량 삼각점이었거나 등산로 정비 과정에서 설치한 지지대였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이 경성을 개발한 것도 그렇다. 당연히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도시계획을 추진했을 것이고 그 혜택을 내지인이 가장 크게 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지인이란 상대어인 조선인을 차별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자국에 사는 일본인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도시계획의 피해자 상당수가 내지인이었다. 말하자면 일본 국가의 이익이 일본 국민의 이익과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국민의 이익과도 상치되는 도시계획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총독부가 목표로 삼은 것은 ‘문명화’였다고 말한다. 좀 더 문명화된 도시를 꿈꾸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경성을 문명화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총독부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 11월에 29개 노선의 도로망을 구축해 경성을 격자형 도시로 개발하겠다는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을 발표한다. 도로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토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토지 수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보상을 요구하는 내지인이었고 조선인 중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저자는 조선인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의 제기나 저항이 원천적으로 막혀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총독부가 단지 경성을 문명화된 도시로 개발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쇠말뚝까지는 아니지만 자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선왕조의 상징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묘관통선’으로 불리는 사직단-광화문-안국동-돈화문-동숭동을 잇는 6호선 도로였다. 다른 노선은 모두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거나 재정비하는 것인데 비해 이 노선은 도로가 아니었던 곳에 새로 도로를 낸 것이다. 도로가 아니었던 곳이라는 말은 도로여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한 덩어리였던 종묘와 창덕궁과 창경궁을 찢어발긴 것이다. 총독부 위세에 눌려 살던 순종조차 끝끝내 반대해 결국 순종이 죽고 한 달 후에야 착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왕실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이것을 쇠말뚝과 마찬가지로 풍수단맥설(風水斷脈說)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양 도성의 조성 원리를 풍수라는 단일 변수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풍수가 감안되기는 했지만 그밖에도 많은 요소가 고려되었고, 풍수가 그 중 주요 요소였다고 판단할만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왕실 뿐 아니라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던 조정마저도 한 목소리로 반대하던 종묘관통선 도로 개설에 대해 시중에서는 긍정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신문에 이 도로가 개설되면 북부 일대의 교통이 원활해질 것이라는 기대와 베르사이유궁전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는 세상에 궁궐 안으로 도로가 지나가는 게 무슨 대수이겠느냐는 논조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어느 신문에서는 종묘를 공원으로 만드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왕실과 조정의 중대사가 더 이상 민중의 서러움일 시점은 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6년 4월 매일신보는 사설에서 “종묘의 존엄만 중시해 시민의 어려움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종묘를 보호해야만 존엄이 지켜진다는 주장은 시대착오”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해 종묘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종묘를 개방하는 것은 금후 조선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라도 필연적으로 닥쳐올 운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도 더 노골적으로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을 보면 ‘왕조의 상징으로서 종묘의 존엄’이라는 절대성을 부정하는 시각이 시일이 흐를수록 더 많이 보인다는 점도 주목된다.


당시 총독부에서는 도시계획에 필요한 부족한 재원을 수익자부담 원칙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도로 정비로 교통이 편리해지고 따라서 도로변 주민이 입는 이익도 적지 않으니 한편으로 합리적인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공사비 절반을 주민에게 걷는다면 당장 넉넉지 않은 조선인들은 집을 팔수밖에 없고 결국 그 집은 내지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만 보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총독부는 ‘문명화’라는 일관된 방향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 민족차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경제력의 차이’가 결국 ‘민족차별’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반발 때문에 결국 대대적인 도시계획은 간선도로 정비 수준에서 마무리된다.


지금은 서울의 명물이 된 청계천이 도시계획의 대상이 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겪고 나서 한양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러다 보니 청계천변에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재정이 어려운 중에도 영조 때부터 2-3년에 한 번씩 하천을 준설해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총독부가 청계천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청계천은 오물과 배설물 투기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그뿐 아니라 천변 도로가 워낙 좁아서 통행인이나 마차 낙상사고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35년경부터 청계천을 복개할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청계천 상류인 삼청동에서부터 국립현대미술관-광화문 네거리-다동을 지나는 구간을 콘크리트로 복개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이미 상부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하부는 지하철을 구상했다고 한다. 당시 복개를 계획한 구간 중 일부 구간은 해방 당시까지 끝내지 못했다.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착공 되어 1961년 12월 오간수교(청계천6가)까지, 그리고 1970년대 초가 되어서야 마장동까지 복개공사를 마쳤다.


책을 읽다 보니 ‘경성부회(京城府會)’라는 말이 몇 곳에 나타난다. 저자가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놓지 않아서 그저 지금의 지방의회 정도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책에 따르면 ‘경성부회’가 구성되기 전에 ‘경성부협의회’가 있었다고 하고 1931년에 ‘경성부회’ 첫 선거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총독부가 추진하는 도시계획이 경성부회 뿐 아니라 경성부협의회의 의제로 올라와 상당한 격론을 벌인 기록을 몇 번 인용하고 있다. 부회의원(지방의원) 중 다수는 내지인이었고 조선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소수에 불과한 조선인 의원이 총독부 관리를 불러 따지고 결국은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모습이었다. 당시에 지방의회가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지방의원이 총독부 관리를 대상으로 한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나는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나 거기서 멀지 않은 돈암동 언저리에서 40년 가까이, 그리고 지금 홍은동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잠시 서울을 떠난 일은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십 년 넘게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서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작년에 송은영의 <서울 탄생기>를 읽고 지역연구자인 김시덕의 <갈등도시>를 읽으며 그동안 뿌리를 박고 살아온 서울의 옛 모습과 거기 어디쯤 포함되어 있을 내 옛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프로TV에서 김시덕이 출연하는 <도시야사>를 듣게 되었고, 그가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최종현의 <오래된 서울>에 이어 오늘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저자인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염복규 교수는 1971년 ‘서울 동북 지역’에서 태어나 ‘서울 서북 지역’에서 주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일제강점기의 경성에 대한 수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지금도 한국 근현대 도시 변화와 식민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가 서울 동북지역에서 태어났다니 아마 나와 생활반경이 상당히 겹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책 말미에 언급한 ‘전원주택단지로서의 돈암지구 도시계획’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에 따르면 돈암지구는 일제강점기 말에 전원주택단지로 개발된 계획도시이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다른 곳보다 가로가 반듯반듯하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그곳이 대표적인 계획도시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오늘 지도를 보니 정말 현대 신도시 못지않게 잘 정비된 곳이다. 중학교 입학할 때쯤 서울의 5대 공립으로 경기, 경복, 경성(서울), 용산, 육구(경동) 중학교를 쳐줬는데 이 책에 따르면 그것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순서라고 한다. 아래 그림의 학교 A가 내 모교인 돈암초등학교이고 학교 B가 경동중학교이다. 시장 A는 지금도 성업 중이고 (젊은이들이 잘 모이는 ‘돈암동’이 바로 이곳이다), 시장 B는 잘 모르겠다.



덕분에 평생 서울사람으로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서울의 도시형성사를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추천하기는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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