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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16. 2022

공정하다는 착각

공정은 선한 것인가?

마이클 샌델

함규진 역

미래앤

2020년 12월 1일


우리가 자랄 때만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좋은 대학을 나와 성공한 이들이 허다했다. 요즘은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성적도 좋다. 성적이 경제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대학입시는 성적으로 평가해야지 학생이 어찌 할 수 없는 다른 요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적이라는 것이 학생이 어찌 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니 그런 주장은 이미 정당성을 잃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주장의 전제조건에 숨어있는데, 성적이 좋은 사람이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누리는 더 큰 혜택’을 차별 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더 큰 혜택을 누리는 것, 즉 능력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공정하기만 하다면 노력과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능력주의는 기여도에 관계없이 똑같이 보상하거나 정해진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체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오직 각자의 성과대로 보상하는 것은 차별이 배제될 뿐 아니라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런 능력주의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먼저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고, 경쟁하는 과정이 정의로워야 하며, 결과가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쓰고 나서 보니 대통령 취임사였다.) 그러나 기회와 과정과 배분을 공정하게 만드는 장치는 말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를 통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능력주의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공정하지 못한 능력주의의 결과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해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그 모습이 눈꼴사나운 건 제쳐두더라도 오만한 사람들이 자기가 거둔 성공이 오로지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할 때 그 결과를 자기가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에 대한 보상이 아무리 커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패의 책임이 오롯이 실패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럴 경우 실패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생겨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약화시키며,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


미국의 능력주의는 비민주적이고 세습적인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을 보장하기 위해 1940년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던 제임스 코넌트가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하버드대는 배경과 상관없이 지능만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학생을 선발하려고 했으며, 좋은 고등학교에 다닌 학생이 더 유리해지지 않도록 교과 성적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SAT가 되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SAT 점수도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타고난 지능만을 측정하는 방편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득이 높은 가정의 자녀일수록 점수가 높았다. 연소득 20만 달러 이상인 가정의 자녀가 고득점을 얻을 확률은 20%인데 반해 2만 달러 이하인 경우는 2%였다. 또한 고득점자 부모들 중에는 학위를 가진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세습적인 엘리트가 능력주의 엘리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주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극성 학부모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는 1976년에 비해 2012년에 자녀 숙제를 도와주는 부모가 다섯 배로 늘었다. 또한 1981년에 비해 1997년에 6~8세 아이들이 노는 시간이 25% 감소했으며 숙제는 두 배로 늘었다. 이런 현상은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데 따른 합리적인 대응방식이었다. 그리고 부모 개입이 심할수록 불평등이 크게 두드러졌다.


저자는 이와 같은 불평등을 해결하고 완벽한 능력주의를 실현한다 해도, 그래서 각자 직업과 보수가 노력과 재능에 완전히 비례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인지 묻는다. 저자가 정의로운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분노를 가져다줄 것이며, 어느 쪽이든 공동체에는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내용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그동안 산발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덧붙여 시장 가격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거론하며 그것을 공정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금전적 가치는 수요와 소비자의 구매력과 대체재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 모든 요인이 경제시스템 자체가 작동하면서 창출되는 것이지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이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해 가격을 매기는 것은 내 노력과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그 재능에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면 그것은 단지 행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부만 행운을 누리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생긴다.


정의론을 쓴 존 롤스는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그것으로 어떤 자격을 얻어서도 안 되고 더 나은 출발점을 차지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능력을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되 다만 그 보상이 전적으로 그의 것만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나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범위 안에서 그 몫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노력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그만한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니, 그런 환경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사회가 도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배분이 공정해야 모든 게 공정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승자와 패자가 생각하는 배분의 범위가 다르고 기준이 다를 뿐 아니라 공정에 대한 인식조차 다르니 공정한 배분이란 당초 도달 가능한 목표가 아닌 셈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이 차이를 좁혀가는 것뿐인데, 이는 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결론도 그저 책을 마무리 짓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것이 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지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자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사실 해결책이라는 게 있기도 어렵고.


이 책을 읽다가 저자의 독특한 전개에 한동안 붙들려 있었다. 능력주의 논쟁을 기독교에 연결시킨 것이다. 저자는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가 아니면 오직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는 기독교의 오래된 논쟁을 능력주의 논쟁으로 해석한다.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면 신의 역할에 한계가 생기고, (아무런 노력 없이)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공정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야고보서가 요구하는 행함을 통한 구원이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루터의 은총론이나 칼뱅의 예정론은 분명히 반능력주의적이다. 하지만 능력과 관계없이 은총에 의해, 혹은 예정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보이는 것은 능력주의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로 인해 수십 만 명이 희생당했을 때 국내 감리교 어느 목사가 이슬람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설교해 물의를 일으키고, 미국에서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죄로 얼룩진 악의 도시에 대한 신의 징계라고 설교해 논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 혹시 은총이나 예정조차 ‘믿음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는 미국의 청교도들이나 복음전도자들은 “신의 은총은 무조건적인 선물이 아니며 자기들이 성취한 것이고 그래서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미국 기독교에서 능력주의가 신앙의 본질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유한한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은 ‘무한한 신의 은총’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미국 기독교가 능력주의를 신앙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건 미국 기독교의 문제일 뿐 기독교 전체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본질이 공정과 배치된다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애쓰지 않고 결과를 얻는다는 반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능한 신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공정하지 않은 신은 바른 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정’이 진정으로 공정한 것인지, 공정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그러기에 이 책은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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