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Feb 10. 2022

헤이트

혐오와 혐오표현

최인철ㆍ홍성수 외

마로니에북스

2021년 11월 15일


지난 10월 한국에 돌아와서 격리 끝내고 제일 먼저 간 곳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평등길 걷기’였다. 차별금지법 처리시한인 11월 10일 국회에 도착해 법 제정을 촉구할 목적으로 한 달 전 부산을 떠난 도보행진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불과 이틀, 대전에서 청주까지 30여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나름대로는 그것이 그들에게 상처를 입힌 한국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사죄라고 생각했다.


차별금지법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 위에 세워진 교회’가 먼저 제정을 요구하고 나서야 했다. 뜻밖에 교회가 앞장서 반대했고, 그래서 몹시 혼란스러웠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각각의 주장이 사실인지 살펴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교회가 나서서 요구해야 할 ‘약자를 위한 제도’를 교회가 가로 막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승섭ㆍ김지혜ㆍ홍성수, 그리고 김근주의 글을 읽고 강의를 들었다.


차별의 또 다른 모습인 혐오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혐오라는 주제 하나로 심리학ㆍ법학ㆍ언론학ㆍ역사학ㆍ철학ㆍ인류학ㆍ사회교육학 학자 아홉이 사흘에 걸쳐 강의한 내용과 토론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추천사에서 어느 분은 이렇게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이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엮은 융합적 시도는 이전에 본 일이 없다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혐오는 무엇인가?


저자는 혐오는 “글자 그대로 싫어하고(嫌) 미워하는(惡) 것으로,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비도덕적인 존재 혹은 비위생적인 존재에 대하여 느끼는 역겨운 감정”이라고 정의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인철) 또한 ‘혐오표현’이란 ‘정체성을 이유로 그에 대한 혐오를 말이나 글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홍성수) 일시적이거나 개인적인 혐오가 아니라 인종주의ㆍ자민족 중심주의ㆍ반유대주의ㆍ성차별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사회적 의미의 혐오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민정)


이 책의 바탕이 된 온라인 컨퍼런스를 주관한 티앤씨재단의 김희영 대표는 몇 년간 심한 악플의 대상이 되었다. 누군가 김 대표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 대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 퍼트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위가 높아졌다. 그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집요하게 악성 루머를 퍼트리는 아이디를 추려 법적 조치를 취했을 때 막상 확인하게 된 그들의 모습이 뜻밖이었다고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이었고 이들을 선동한 인물은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된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그가 예상했던 가해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평범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지위를 가졌거나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 아닌가. 그것 또한 혐오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이 책은 혐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의 장을 만들어 낸 그 또한 혐오의 모습을 되풀이 하고 있다. 물론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혐오는 이렇게 은밀하고 집요하다.


저자는 혐오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홀로코스트를 든다. 유엔이나 유럽연합 같은 국제조직은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는데,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혐오와 차별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반이민자 반무슬림 정서에 기반해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트럼프는 이주자 혐오를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지적한다. (홍성수)


혐오는 왜 일어나는가?


저자는 혐오의 첫 번째 원인으로 편견을 든다. 편견은 다른 사람을 실제로 겪어보기 전에 품게 되는 감정으로, 그 결과가 적대적인 말ㆍ회피ㆍ차별ㆍ물리적 공격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김민정) 그리고 서구에서는 자기 문화가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다른 문화를 혐오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자기 종교만 진정한 종교이고 자기 문화만 진정한 문화라고 생각해 오히려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를 혐오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반성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승찬)


그런 면에서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이슬람 세계와 불편함 관계를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이슬람이라고 하면 머리부터 흔든다. 왜 그럴까? 혹시 서구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영향은 아닌가?


혐오는 어떻게 일어나고 확산되는가?


저자는 전쟁이나 감염병처럼 생존이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모든 게 불확실해지고 불안해지는데, 이런 불확실성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집단을 의지하게 되고, 자기가 의지하는 집단을 지키려는 행위가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최인철) 이와 같은 혐오는 특정 집단을 희생양 삼아 책임을 전가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런 혐오를 극우파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취약한 나라에서 혐오가 더 쉽게 확산된다면서 그 사례로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혐오와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혐한 시위를 들고 있다. (홍성수)


이런 혐오가 확산되는 데는 미디어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웃으면서 보면 더 많이 웃거나 혼자서 볼 때보다 재미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감정 역시 전염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댓글의 영향을 판단하기 위해 독자에게 기사만 보여주거나 해당 기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함께 보여주고 반응을 살펴보니 기사를 비난하는 댓글과 함께 읽은 독자가 기사만 읽은 독자에 비해 기사 내용에 덜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은주) 더구나 요즘은 미디어 알고리즘이 강화되면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정보만 노출되고 다양한 의견이나 주제를 접할 기회가 줄어드는데, 이로 인해 편향된 정보만 취하다 보면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는 거부하는 확증편향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김민정)


몇 년 전, 대선에서 댓글 조작에 간여한 죄목으로 현직 도지사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일이 일어났다. 실정법을 어겼으니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지만, 댓글의 영향이 대선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자들의 논리나 제시하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댓글의 영향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댓글이 그저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여론과 같으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럴 때 ‘표현하지 않는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 의견’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발언을 지지하지 않는다거나 혐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나아가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독려한다. 개인이 연대와 지지를 표현하는 게 무슨 힘이 되겠나 싶지만, 저자는 그런 경우 실제로 악플의 효과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물론 악플을 막기 위해 댓글을 아예 폐지하거나 인공지능을 이용해 악플을 걸러내기도 하지만 이는 사후조치에 불과하다며, 혐오표현이 만연하는 것보다 혐오표현의 바탕인 혐오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조치는 심각한 문제를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김민정ㆍ이은주)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제의 핵심을 놓친 또 다른 경우로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코로나 집단검사명령 내린 것을 거론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사업장이 방역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업장의 문제이니 그 사업장에 대한 방역조치를 하면 되는 것이지 외국인 노동자에게 집단검사명령을 내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을 놓치다 보니 사업장에 대한 방역조치도 놓치고 원래 취약했던 외국인 노동자 집단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고 지적한다. (홍성수)


혐오는 아와 같이 상대적 약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두려움이 혐오로 발전하기도 한다.


저자는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독일 사회 내부에서 언론인ㆍ교수ㆍ변호사와 같은 선망하는 위치에 있던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최호근)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지브롤터 해협이 뚫린 711년부터 비엔나가 공격당하는 1683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 유린당한 유럽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한다. (이희수) 그러나 혐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혐오의 대상이었던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혐오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유럽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이후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저자는 자기 삶이 어려워져서 타인을 포용하고 수용할만한 여유가 없을 때 증오표현이나 혐오표현이 많은 공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은주) 미국 남부에서 주된 산업이었던 목화의 작황이 나빠지자 흑인에 대한 린치가 늘어난 사례를 거론하며 집단의 갈등이 어떤 맥락적 요소와 결합되었을 때 반응이 폭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최인철)


어떻게 혐오를 막을 것인가?


저자는 홀로코스트는 급작스럽게 닥친 사건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집권한 나치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조금씩 늘려나갔고, 그에 대해 국민 누구도 항의하지 않고 동조하거나 방임하는 과정에서 전대미문의 비극으로 전개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공격하고 폄하할 때 그걸 용인하고 방조하면 그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다른 누군가가 목표가 되고 결국에는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면서, 누구라도 그런 행위를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호근)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혐오를 막기 위해 거부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나쁜 것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학살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독일이 제대로 반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유대인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지금 누가 약자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그렇다면 현재의 중동 상황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이 오히려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조건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을 든다는 것은 무조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학살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면서 말이다. (전진성) 이 말은 최근 <메르켈 리더십>을 읽으며 메르켈이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독일 총리인 자신에게 이스라엘의 안보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며, 독일의 역사적 책임이 자기 조국인 독일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천명한 것에 감동했던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혐오를 막기 위해 이와 같이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거부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저자는 누구든 한 개인을 보편적 인간으로 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인철)


하나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저자 김민정은 온라인 혐오표현에 맞서는 대항표현으로 1) 혐오표현에 담긴 객관적 사실을 반박하거나, 2) 혐오표현에 담긴 정당성을 반박하거나, 3)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의 진정성에 호소하거나, 4) 전복ㆍ탈환ㆍ패러디 방식을 제안한다. 저자는 이 중 마지막 방식을 ‘맞받아치는 대항 표현’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위해 연대와 조직이 필요하고 영향력이 큰 기관이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혐오표현이 사실이 아닌 것을 지적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피해에 대한 공감을 호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맞받아치는 대항 표현’을 집단적으로 이행할 경우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지적하고 비판하고 호소한 것의 정당성을 허물 뿐 아니라 이를 집단의 대결로 끌고 가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물론 내가 오독한 것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탁기의 배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