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Feb 09. 2022

세탁기의 배신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

김덕호

뿌리와이파리

2020년 4월 30일


가전제품이 대량생산되어 가정에 자리 잡기 시작한 1930년, 미국 중간계급 여성이 즐겨보던 <레이디스 홈 저널>에 “가전제품이 개발되고 수도도 보급되었는데 오히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면서 “여성의 가사노동을 절약하기 위해 가정에 세탁기나 청소기 같은 가사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왜 정작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더 늘어났다는 것인가”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거의 백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가사노동을 돕기 위해 가전제품을 개발했는데 오히려 가사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놀랍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일부 혹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체적인 현상인지, 지금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기술사(技術史)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김덕환 교수는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통해 미국에서 가전제품이 본격적으로 개발될 당시의 여성과 가사노동, 그리고 가사기술에 대한 연구 결과와 당시의 시대별 동향이나 잡지 광고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현상을 세탁기ㆍ청소기ㆍ냉장고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가사노동


먼저, 가사노동(housework)이라는 용어는 영국에서는 1841년 옥스퍼드사전에 올랐고 미국에서는 1871년부터 사용되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가사노동은 시종일관 은폐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라고도 하며, 따라서 실제로는 엄청난 노동량이 국민총생산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앤서니 기든스는 그의 저서 <현대 사회학>에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한다면 국민총생산의 1/3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가사노동은 다른 노동과는 달리 주부 혼자 감당하기 때문에 ‘철저히 고립된 노동’이다. 지금도 수도ㆍ가스ㆍ중앙난방ㆍ세탁기ㆍ냉장고와 가전기술이 발달한 선진국에서조차 가사노동은 여전히 전체 노동시간의 절반에 달한다.


저자는 예전에는 가사노동이 지금과는 달리 여성의 노동이라고 한정짓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예컨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땔감을 구하고 불을 피우고 물을 길어 와야 하는데, 그것 모두를 여성이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남성도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수도가 놓이고 가스렌지가 나오고 난 후에는 음식 만드는 일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되었다. 결국 가사기술은 남성의 노동만 대체한 셈이라는 것이다.


가전기술이 가사노동 중에서 남성의 노동만 대체했다면 여성의 노동은 그대로일 텐데, 그렇다면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왜 늘어난다는 말인가? 그에 대해 저자는 가전제품은 여성, 특히 주부에게 노동량과 노동시간을 절약하게 만든다면서 편리함과 효율성을 준 대신에 주부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웠다고 말한다. 남성과 아이들은 가전제품이 주부의 가사노동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해 도와주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더 많은 빨랫감을 내놓고 더 다양한 음식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청소기를 사용하면 힘 안 들이고 청소할 수 있는데 왜 먼지를 그냥 내버려둔다는 말인가, 세탁기는 알아서 빨아주는데 왜 옷을 좀 더 자주 빨지 않는가, 거의 모든 집에 욕조가 있고 더운물 찬물도 수도만 틀면 나오는데 왜 아이들을 매일 못 씻긴다는 말인가, 게다가 아이들이 대여섯 명도 아니고 이제는 고작 한두 명인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 말미에 저자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소환한다.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보기는 한 걸까.”


주부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데는 가전회사의 광고도 한 몫 거든다. 가전회사에서 세탁기를 광고할 때 청결을 강조함으로서 주부에게 청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세탁기가 개발되고 나서는 청결기준이 높아져서 가족들이 셔츠를 규칙적으로 갈아입게 되고, 침대 시트도 몇 장씩 갖추고, 의류회사에서는 세탁하기 힘든 면직물 의류를 대량생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세탁은 쉬워졌지만 세탁량이 늘어나 총 세탁시간은 오히려 늘어난다.


이런 면에서 진공청소기나 냉장고도 다르지 않다. 진공청소기 제조사에서는 광고할 때 분당 먼지 수(dpm, dirt per minute)라는 개념을 도입해 주부의 청결의식을 자극한다. 냉장고가 개발되어 매일 장을 보는 부담은 줄었지만 대신 냉동식품이 활성화되어 냉장고가 대형화 되고, 그로 인해 냉장고 가격이 올라가 이를 구매하기 위해 주부가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1950년대에 주부가 직업을 구하는 이유는 대부분 가전제품을 새로 사거나 바꾸는데 필요한 돈을 버는데 있었다. 여기에 가전제품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주부의 심리도 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가전제품은 주부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시간을 만들어 본격적인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진입을 막게 된다.


이와 별개로 19세기말 일어난 위생운동으로 인해 질병이 불결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불치병으로 여겼던 결핵이 세균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져 세균을 없애는 것이 강조되고, 영양학의 발달로 식단의 짤 때 영양가를 고려하게 된다. 결국 모든 질병이 청결과 영양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되다 보니 그 책임이 모두 주부에게 미뤄진 것이다. 1950년 발표에 따르면 당시 주부 1명이 감당하는 가사노동량은 백 년 전인 1850년 주부 한 명이 가정부 서너 명을 데리고 감당하던 노동량에 이른다.


가전제품


가전제품이 소개된 것은 189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세계박람회에서였고, 이때 모형전기부엌(model electric kitchen)이 선을 보인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러서야 노동절약형 가전제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가전제품이 개발될 무렵에 가정부가 줄어든다. 이에 대해 가전제품이 가정부를 대체한 것인지 아니면 가정부가 줄어서 가전제품 개발이 촉진된 것인지 하는 논쟁이 일어난다. 대체로 가정부가 모자라 가전제품 개발이 촉진되고, 이렇게 개발된 가전제품이 다시 가정부 수요를 감소시켰다고 해석한다. 예전에는 가사노동을 가정부에게 시켰지만 산업이 발달하면서 이들이 힘들고 사생활이 없는 가정부를 마다하고 대우가 더 나은 공장노동자나 판매원으로 자리를 옮겨 급기야는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정부를 붙들어 두기 위한 수단으로 가전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전제품이 가정부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에서 전기가 보급되던 초기에는 주로 밤에 전기 수요가 몰려있다 보니 낮에는 발전시설을 놀려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력회사에서 낮에 전력이 필요한 가전제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직접 가전제품 개발에 나선 것도 가전제품 보급을 촉진시키는 이유로 작용한다.


손에 잡히는 경제


오래 전부터 MBC에서 방송되는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즐겨 듣는다. 경제에 취약한 이과생 출신에게 경제를 상식 수준 이상으로 알게 해주는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그 중 책을 소개하는 순서가 몇 있는데, 얼마 전 <공부왕 이종훈> 코너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 내용이 매우 인상 깊어 기억해놨다가 오늘 읽었다.


방송 순서 중 한 코너가 길어야 이십 분을 넘기지 못한다. 거기에 진행자의 발언도 들어 있으니 발표내용은 겨우 십오 분 남짓 하다. 당연히 책의 일부만 소개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 더 얻을 게 있을 줄로 기대하고 책을 펼쳤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책이 시원치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백여 쪽에 가까운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십오 분 남짓한 시간에 핵심 전체를 전달한 그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르켈 리더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