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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05. 2022

메르켈 리더십

지도자의 덕목

케이티 마틴

윤철희 옮김

모비딕북스

2021년 10월 8일     


대선 후보들의 사자토론이 벌어진 날 도서관 서가에서 <메르켈 리더십>을 뽑아 들었다. 작금의 선거판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추문을 대하며 왜 우리에게는 메르켈 같은 지도자가 없는지 안타깝기도 하고, 그런 지도자를 길러낸 그 사회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통독 후 최장수 총리인 메르켈은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각국 지도자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케빈 러드 호주 총리는 메르켈을 대할 때면 여성 지도자를 대한다는 생각은 없고 위대한 지도자를 대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바마의 보좌관 벤 로즈는 메르켈은 오바마가 본보기로 삼고 따라간 지도자 상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바마가 메르켈에 대해 ‘정치를 목표가 아닌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르켈은 그렇게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오바마를 언변이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깊이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행동과 가치관을 잘 설명하는 사례인지도 모른다.     


그는 상대방이 날조된 주장으로 공격할 경우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젠다로 상대방을 압박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출처를 따지지 않고 인정했으며, 라이벌 정당의 프로그램을 자기 정책으로 삼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것으로 오히려 상대방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선거운동에서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다 갖고 있는 척 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의 견해를 경청하고 공감을 표했다. 상대를 지배하려 들거나 상대에게 점수를 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연설문 담당자에게 과장된 수사나 거창한 아이디어, 혹은 위대한 내용을 담은 문장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연설문 읽는 연습도 마다했다.     


그는 선거운동에서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구체적인 정책이 아닌 핵심가치를 내세웠다. 개인적으로 마음 깊이 간직한 신앙, 의무와 봉사라는 확고부동한 신념, 독일은 유대인에게 빚을 졌다는 믿음, 과학자 출신답게 증거를 기초로 정확하게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 독재자를 향한 본능적 혐오, 표현과 이동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의 신념은 확고부동했지만 늘 국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전진했다. 어쩌면 우리와 모든 것이 이렇게 완벽하게 다를 수 있는지.     


그는 총리로서의 공적인 위치와 개인으로서의 사적인 생활을 철저히 구분했다. 일반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 말고는 그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동료라고 해도 그의 사생활에 관련한 아주 사소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거의 끝장이 난다. 어느 가까운 동지는 “제안 감사합니다. AM”이라는 내용이 전부인 메일을 외부에 공개한 후 끝내 메르켈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 스타일리스트나 보좌관 누구도 집무실 인근에 있는 그의 사저를 방문한 일이 없다. 한 번은 그가 가족과 이탈리아에서 휴가 지내는 사진이 타블로이드 <빌트>에 게재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메르켈이 엄청나게 분노했으며 그 즉시 인터넷에서 그 모든 기사가 자취를 감췄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선진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총리의 사생활 침해에 대해 대중이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총리의 사생활이라고 해서 모든 대중이 다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우리 같으면 물 만난 고기처럼 온오프라인 모든 지면이 그것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대중이 그의 사생활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어떻게 자기 전기를 쓰는 것을 허락했을까?     


저자인 케이티 마틴은 주독 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홀부르크의 아내로서 남편 재임 때 메르켈과 인연을 맺는다. 그 또한 부모가 냉전시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일이 있는 헝가리 출신이어서 동독 출신의 메르켈과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생활을 노출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 메르켈이 4년 동안이나 자기 집무실을 드나들며 취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메르켈이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을 때 어느 기자가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어본 일이 있냐는 물음에 “그건 제가 아니던 데요”라고 대답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퇴임하면 누군가 자기 전기를 쓸 것이니 차라리 먼저 진솔한 자기 모습을 공개해 왜곡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메르켈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메르켈이 태어난 직후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하라는 루터교회의 부름을 따라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메르켈 가족이 동독으로 이주한 후 동서독 사이에 장벽이 세워지고, 통독 될 때까지 감시와 억압이 일상인 동독에서 살고, 통독 된 이후에 메르켈은 서독으로 이주해와 동독인으로서 차별을 경험한다.) 카스너 목사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번도 딸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메르켈은 진심으로 아버지의 응원을 받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한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그의 부모는 딸에게 한 번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정체성은 안정적인 서독의 삶을 뒤로 하고 동독의 위험과 불안 속으로 뛰어든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그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는데, 그와 무척 가깝게 지낸 동생들은 단 한 번도 메르켈에 대한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업무에서 오는 압박감을 감당하는데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매우 드물게 사생활의 일단을 드러냈다. 그의 고백대로 요아힘 자우버는 아내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노출된 공인인 아내가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도록 도왔지만, 아내의 총리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딸과 사위를 백악관 실세로 등용한 트럼프, 그리고 가족과 측근 문제로 온갖 추문을 일으킨 우리 지도자들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물리학자였던 메르켈은 삼십 중반에 정치에 입문했다. 메르켈이 물리학을 선택한 것은 동독에 살면서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국가와 마찰을 빚지 않도록 나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것이다. 그의 대학 친구는 메르켈을 기억력과 체계적 조직적 사고력을 갖춘 학생으로 기억한다. 그는 좋은 물리학자였지만 노벨상을 탈 정도로 뛰어난 학자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고, 그래서 최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에서 목표를 추구하고 싶어 했고,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수십 년을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치에 입문한지 일 년 만인 1991년 헬무트 콜 연방내각에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입각한 그는 물리학자답게 정밀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구사했고 남보다 두 배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래서 유연하지만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결정을 성급하게 내리는 것을 싫어했으며 일을 맡으면 계획대로 끝냈다.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거머쥐기 위해 과감히 돌진했다.     


독일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공통점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뿐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방지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국가’로 인식할 국가규모의 공공 행사도 없고, 통일기념일조차도 지역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 관리 대부분은 독일 연방군의 역량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 어떤 나라도 독일을 군사적 위협요소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일 정부가 군사력 사용을 꺼린다는 점을 걱정할 정도이다.     


메르켈 역시 다르지 않다. 그의 집무실 내부에는 권력과 역사적 상징물이 없다. 자국 역사를 편한 심정으로 대하지 못하고 강대국이라는 최근의 지위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의 총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방문해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의회에서 연설할 때 살인자의 언어로 연설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면서 의원 여럿이 퇴장했다. 그는 히브리어로 여기 의사당에서 여러분께 연설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이어서 독일어로 자신의 모국어로 연설하도록 허락하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면서 독일 총리인 자신에게 이스라엘의 안보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천명하고, 독일의 역사적 책임이 자기 조국인 독일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독일인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인해 파문당한 주교 4명을 복귀시킨 것을 규탄했고, 바티칸의 결정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인상을 줄 때 근본적인 문제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그 주교들은 다시 파문당했다. 그는 강한 유럽을 만드는 일에 헌신했는데, 그것은 강한 유럽이야말로 독일이 공격적인 과거로 회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가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메르켈은 평소의 신중한 스타일과 달리 사전 예고도 없이 난민 정책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독일은 난민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이 난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유럽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1938년 미국을 비롯한 유럽 32개국이 프랑스 에비앙에 모여 히틀러의 올가미에 들어간 유대인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의논만 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해 결국 유대인의 학살로 이어졌다”는 그의 역사의식이 바탕이 되었다. 2012년 7만7천 명에 불과했던 난민은 2015년 47만5천 명, 2018년 80만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수용소가 아닌 시민 속에서 시민과 함께 살았으며, 이 중 절반이 취직했거나 직무교육을 받았다. 독일어를 배우고, 취학연령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정착할 장소는 정부의 결정을 따른다는 조건이었다. 그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코로나 판데믹의 한복판인 2020년 3월, 그는 TV 연설을 통해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미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지만, 국민들은 그를 신뢰했다. 그가 결코 국민들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종종 자신의 결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데 실패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왜곡하거나 미화하지는 않았다.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민들 앞에 직접 나타나 책임 있게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럴수록 정기적으로 국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이데올로기나 도그마를 고집하지 않았다. 실수에서 배웠고, 새로운 아이디어라면 출처를 가리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결과를 얻기 위해 자존심을 거듭 제쳐두었다.     


그는 위대한 독일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세기의 지도자였다. 레임덕은커녕 퇴임할 당시 지지도는 80%가 넘었다. 그는 묘비명을 ‘겸손과 품위’로 정했다고 한다. 위대한 지도자이고 겸손과 품위까지 갖춘 그가 내린 결정이라고 해서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담을 나누어가져야 하는 일인데, 그 부담을 누구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국민들을 지금까지 인도해온 것이다.     


대선을 한 달 여 앞둔 지금 대통령 후보들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이 뿜어내는 악취로 온 세상이 사납다. 그런 상황에서 <메르켈 리더십>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머리를 끄덕이고, 메모를 하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메모한 만큼 내 생각도 빼곡하니 적어 넣었다. 그러다가 신세타령 같은 내 생각은 모두 지워버리고 스스로 지도자라는 이들이 읽어야 할 내용만 간추렸다. 쇠귀에 경 읽기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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