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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을 살리자는 법, 그러나..

by 박인식

정혜진

미래의창

2019년 12월 6일


1.


세상에 뒤쳐졌다고 여길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 먼저 나이를 본다. 지식이나 사회적 위치로는 넘볼 수 없는 ‘삶의 지혜’가 나이에 비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윗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공손해진다. 그렇다고 꼭 물리적인 나이를 말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각자가 겪었을 삶의 폭과 깊이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터뷰 기사는 찾아서라도 읽는 편이다.


인터뷰 기사 못지않게 흥미를 가지는 것이 소송 기사이다. 인터뷰 기사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생의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소송 기사는 남이 모르기를 바라는 어두운 면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죄를 짓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나 죄가 드러났을 때 범죄자가 보이는 반응,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 관심을 가졌다. 소송 기사를 읽어가다 보니 차츰 그 배경으로 관심이 옮겨갔고,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사회적인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법과 관련한 책을 꽤 여럿 읽었다. 법이라는 것이 평생 이과(理科) 글쓰기를 해온 내 성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송사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을 몇 권 읽게 되었고, 그 후로 신간이 나오는 대로 찾아 읽고 있다.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십 수 년 기자로 일하다가 국선전문변호사로 일하는 이가 책을 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실형을 받은 전력이 있으면 단순 절도도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이른바 ‘장발장법’ 위헌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저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말을 듣고 그를 둘러싼 가족과 소외된 이웃과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고 했다. 그가 쓴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당연한 처벌 너머에 있는 취약 계층의 가혹한 현실은 변함없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기자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기자의 관점에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에 내내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늘 절벽 앞에 있고, 가족이든 친구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그렇게 오랫동안 소외되어 살다 보니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기대하기 어려운, 늘 피해 의식에 가득 차 있어서 자기가 잘못한 것도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상대의 배려를 배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을 기자 특유의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2.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뺑소니 사고를 당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적 능력을 상실한 이가 요양원에서 다른 환자에게 과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야기. 더 비극적인 것은 죽은 환자 역시 자기가 어떤 폭력을 당했는지조차 설명할 수도 없고 이를 대신해줄 가족도 없는 지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


가난과 우울증으로 알코올중독이 된 엄마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필로폰에 손댄 아빠, 그 아빠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엄마를 돌보며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자기들 걱정 말고 수감생활 잘 하라고 의젓하게 아빠에게 위로 편지를 보낸 초등학생 중학생 남매.


수십 년 잘 운영해오던 기업이 어느 한 순간 빚더미 위에 올라앉자 이를 해결하려고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허위 서류를 꾸며 수배를 받게 되고, 아들과 공사장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가 결국은 자수해 수감되어 있는 동안 가정은 해체되고 자식이 조직 폭력배가 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당장 생계를 잇기 위해 중고거래 사기를 벌이고, 수감되지 않으려고 피해 보상에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러다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같은 사기를 벌이고, 그렇게 전과 수십 범에 이른 가장.


청각장애인 부모로부터 청각장애를 안고 태어났음에도 가난해 수화조차 배우지 못한 아이가 음란채팅으로 기소되었지만 의사를 소통할 방법이 없어 제대로 변론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가난해 수화조차 배울 수 없었다니...


3.


저자는 신앙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젊은이에 대한 변론을 준비하면서 어차피 병역기피로 징역을 살아야 한다면 상급심 판결을 구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1심 결과를 받아들여 하루라도 젊었을 때 다녀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충고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얼른 해결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인생 선배로서 안타까움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조언에 대해 그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아홉 살 때 같은 회중 형 재판을 보러 법정에 처음 와봤습니다. 재판을 받고 징역 가는 걸 많이 봤습니다. 제 친형도 병역법 위반으로 감옥 갔다가 얼마 전 출소했고요. 결국 징역을 가더라도 형들은 대답 없는 강물에 계속 돌을 던졌어요. 파문을 지속해서 일으키는 거죠. 물론 큰 맥락에서 변한 건 없어요. 하지만 극소수라 해도 하급심 무죄도 나고, 위헌법률심판제청도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바뀌겠죠.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지 않습니까. 제게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저도 제 몫을 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저자는 로스쿨에서 외웠던 ‘양심’의 정의를 떠올린다.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저자는 양심적 병역거부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예의 바르고 진지하며 변호를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비록 실정법으로는 엄연히 범죄자이지만 그들은 다른 피고인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품격이 있다는 것이다. 교도소에서도 일반 수형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해서 교도관의 일을 돕는 정도를 넘어 교정행정의 한 축을 맡고 있기까지 하다고도 했다.


저자가 변호했던 그 젊은이가 쏟았던 무모한 낙숫물은 결국 바위를 뚫어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어졌고, 그 젊은이는 도저히 피할 길 없어 보였던 전과자의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나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대표되는 이단 종파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에 주변 누군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양심을 부인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국민으로서의 그들의 권리를 제한할 이유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이 그렇게 반가웠다.


이 이야기 때문에 그저 읽고 접어둘 책에 굳이 서평을 쓰게 되었다.


4.


저자가 변론한 사건이 매번 이렇게 가슴 아프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노동권이 훼손되는 것에 분개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교통방해죄로 기소된 중년 여성을 변호할 때 일이다. 매사에 모범적이고 성실한 시민이었던 그는 각목은커녕 시위 팻말 하나 들지 않고 시위를 하던 중 이를 막아선 경찰에 밀려 도로로 나가게 되었고, 경찰에 의해 채증되어 기소되었다.


그는 “토끼몰이 하듯 경찰이 차벽으로 사방을 막은 상황이었고,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밀리는 대로 가다 보니 도로였다. 그런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결과적으로 도로로 나갔다, 그래서 차가 이동하기 불편했다, 그런 이유만으로 죄가 된다고 하는 거 아니냐? 그러면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형사 처벌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교통방해죄 판례에 익숙해 이의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던 저자는 그의 지적을 받아들여 상식에 근거한 답을 낸 다음 대법원 판례에 모순되지 않으면서 그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를 찾았고, 결국은 고의가 없었다는 판단을 이끌어 낸다.


저자는 이 변론을 준비하면서 독일 학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사례 문제를 풀 때 법적 사고방식을 체계적으로 동원해 결론에 도달한 후 그 결론이 정의의 관점에서 수긍할 만한 것인지 검토할 때 ‘우리 할머니는 이런 결론에 대해 뭐라고 하실까?’ 묻는다. 할머니로 대표되는 법률 문외한,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분이 그 결론에 대해 ‘그건 옳다고 할 수 없어’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법적 사고 과정에서 무엇인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개념에만 너무 집착해 실질 가치를 반영하지 못할 때 그런 일이 생긴다.”


5.


분량도 280쪽으로 많지 않고, 십 수 년 기자로 닦아온 저자의 글 솜씨 때문에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중 음지에 사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어서 추천할 만 하다.


이 책 뿐 아니라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쓴 에세이들이 대부분이 이런 면을 조명하고 있으니 함께 읽어볼만 하겠다. 그런 뜻에서 몇 권을 추천하자면...


○ 재심전문 박준영 변호사의 ‘지연된 정의’

○ 생활인으로서 검사의 이야기를 담은 김웅 (전) 검사의 ‘검사 내전’

○ 변호사에서 경력 판사를 자원한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야기’

○ 소설가이자 방위산업청 공무원인 정재민 (전) 판사의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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