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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오늘 뭐 먹지?

입맛의 고향

by 박인식

권여선

한겨레출판

2018년 5월


십년 넘게 한국을 떠나 살다 보니 휴가 날짜가 잡히면 가서 뭘 먹을지 손부터 꼽게 된다. 그런데도 막상 뭐 하나 제대로 먹고 온 게 없어 늘 아쉽다. 아내 손맛이 그리 빠지는 편은 아니니 재료만 있으면 비슷하게는 먹을 수 있겠는데, 결정적으로 이슬람 금기인 돼지고기와 술이 없으니 뭐 하나 음식이 갖춰지질 않는다.


여기 와서야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이 그렇게 많은 줄 알았고, 술이 음식인 줄 알게 되었다. 몇 년쯤 지나서 회를 떠다 먹는 것까지는 터득했지만, 술이 없으니 도무지 식사가 완성이 되지를 않더라는 것이지. 그제야 목사님이신 장인과 사이다 잔 놓고 먹다보니 회라고 다 회가 아니더라며 툴툴대던 아들이 이해되었다.


요즘 먹방이 대세라고 한다. 먹고는 싶은데 살찔까봐 먹지 못하는 이들이 대리만족하느라 보는 모양인데, 나는 고통스러워 차마 먹방을 보지는 못하겠고 그저 온라인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이나 보고 이야기나 읽으며 위안을 삼는다. 그러다가 어느 분이 올려놓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모든 음식을 안주로 여긴다. 안주 많이 먹기로 말하자면 누구에게 빠지지 않는 나도 모든 음식을 안주로 여겨보지는 않았다. 저자는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고,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고 거침없이 천기를 누설한다. 뭘 먹어도 저자보다 십년은 더 먹었을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 천기를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는 “오늘 무슨 안주 먹지?”의 축약형이라고 했다. 나는 술이 없어도 꾸역꾸역 잘만 먹는데, 저자는 아무리 맛난 음식도 술이 없으면 먹지 않는다고 호기를 부린다. 사실 그 호기라봐야 마음만 먹으면 술을 먹을 수 있는데서 사니 부릴 수 있는 것이지, 술 먹다 걸리면 추방당하는 곳에 살면 저자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저자는 안주로 순대를 만난다. 심지어는 만두조차 안주로 여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만둣국이 해장에도 탁월하다는데, 비록 돼지고기 없이 어찌어찌 만둣국은 끓인다 해도 술이 없어 그것이 해장에 탁월한지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서울 가면 꼭 한 번 해보리라.


서울에 가면 제일 먼저 순댓국부터 찾는다. 언젠가는 며칠을 순댓국으로 점심을, 모둠순대를 안주 삼아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다. 모처럼 본사에 왔다고 밥 사주겠다는 동료들 주머니도 생각해줄 겸. 그래도 저자처럼 식용 비닐에 당면으로 채운 순대를 먹지는 않는다. 그걸 순대라고 부르는 건 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본사 아래층 상가에 아바이 순대집이 있었다. 두툼한 대창에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를 꽉 채워 넣은 순대에, 밤새 끓여낸 국물에 토렴한 순댓국까지 맛보고 나니 가히 순대의 진경을 맛보았다 싶었다. 그러고 나니 당면 순대는 순대가 아니더라.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 법이라니, 아무리 음식이 궁한 사막 한복판이라 한들 순대의 진경을 맛본 사람으로서 당면 순대를 먹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지난 번 누가 서울 다녀오면서 가져다 준 당면 순대를 과감히 거부하였다.


만두는 기본적으로 맛있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만두가 맛없어지기 위해서는 ‘굉장히 만두스럽지 않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그리고 사막 한복판에서 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터득한 ‘굉장히 만두스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돼지고기의 부재’였음을 고백한다. 저자는 사람이 어떻게 만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묻지만, 돼지고기 빠져봐라. 그게 만두인가. 눈치가 보여 아내가 애써 해준 만두를 먹기는 해도, 그래서 기쁘지는 않다.


아버지가 술 드신 다음 날이면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생물 오징어를 사오시곤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부엌에 들어가 차려놓은 밥상조차 챙겨들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오징어만큼은 직접 손질하셨다. 오징어 껍질을 벗기고, 가늘게 채를 썰고, 초장을 풀어 만든 국물에 국수처럼 말아 드셨다. 몇 해 전, 지금은 은퇴하신 사장께서 물회로 점심을 내신 일이 있었다. 물회 좋아하는 걸 기억해주신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 집 물회가 기가 막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저자는 죽변에서 물회를 처음 대했다고 했다. 처음 본 물회에 눈이 팔려 때마침 걸려온 영화관련 원고청탁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가 돌아와 죽을 고생을 했단다. 저자에게 음식은 그저 안주일 뿐이었을 텐데, 어떻게 초면에 물회의 진경을 깨달아 거기에 정신이 팔려 고생을 자초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음식을 안주로 여긴 이의 미각이 그닥 대단할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죽변 항의 비린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폴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미항이라는 죽변이었으니, 비린내까지 향기롭지 않았을까. 울진 원전 현장에서 일할 때 죽변 방파제 끝에 있는 횟집에 적지 않게 주머니를 털렸는데.


음식으로는 저자의 고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만두 좋아하고 순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면 어른들이 북한 분이신가 싶기도 하고, 물회 좋아하는 걸 보면 동해 바닷가 출신인가 싶기도 하다. 콤콤한 젓갈 좋아는 것으로는 서해 어디쯤에서 자랐나 싶기도 하고.


뜻밖에도 저자의 친가는 부산이고 외가는 서울이라고 했다. 그렇게 출장을 다녔어도 부산 음식이라고 기억나는 것 하나 없고, 서울은 워낙 여러 곳 사람이 모인 곳이어서 뭐 하나 특징적인 음식이 없으니, 저자의 식성으로 고향을 짐작하기 어려운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만두 좋아하고 냉면 좋아하는 걸 보면 외가가 이북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언니 오빠가 계셨어도 돌 넘긴 건 어머니뿐이어서 부엌이 뭔지도 모르고 자라나셨다. 1.4후퇴 때 얼떨결에 나이 많으신 부모님 놔두고 홀로 내려와 힘들게 사시다 보니 어디서 음식을 배울 겨를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자라서까지 연근도 먹을 줄 몰랐고, 김은 참기름에 재어 먹는 걸로 알았고, 버섯도 결혼해서 아내가 해주는 걸 처음 먹어봤다.


그렇게 음식을 배운 일은 없으셨어도 음식에 대한 본능을 남으셨던지 설이던 추석이던 명절음식은 늘 만두에 인절미였고, 별식은 냉면이었다. 그 음식 먹고 자랐고 그게 내 유전인자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맛을 기억하시기만 했을 뿐 배우신 일이 없으니 맛은 뭐... 그러다 보니 만두에 냉면을 좋아해도 솔직히 맛을 가릴 줄은 모른다.


책 재미있게 읽고 옛 기억 소환해 잠시 즐거웠다. 그런데 저자 입맛의 고향이 어딘지는 왜 궁금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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