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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6. 2022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일제강점기 억압과 차별의 정량적 분석

정연태

푸른역사

2021년 1월 29일


일제강점기 억압과 차별의 정량적 분석


일제강점기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는 것처럼 일본제국은 36년간 우리 땅을 강제 점령했고, 이에 억압과 차별이 따르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나만 해도 부모님께서 그 시절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전해들은 바가 많지만, 지금 세대에게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도 그저 역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과문한 탓일 테지만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차별을 정성적으로 기술한 책은 있어도 통계나 자료를 확인해가며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한 책은 별로 보지 못했다. 작년 초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억압과 차별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강경상고 졸업생을 대상으로 학적부는 물론 교지나 동창회 간행물 같은 자료까지 전수 조사해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책이 발간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전자책은 종이책 나오고 두세 달 지나 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 짐작했던 대로 한 해가 저물도록 발간되지 않아 서울에 와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보고서 쓰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았다. 방향을 잡고, 문헌조사ㆍ현장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통계를 내어 경향을 파악하고, 보고서를 성과물로 제출하기까지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모른다. 간단해 보이는 표 하나 만들기까지 처리해야 할 자료와 통계도 수없이 많았고, 설명되지 않는 결과가 나왔을 때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닌지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 몇 번씩 점검한 것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표 하나의 가치를 잘 안다. 이 책에는 그런 표가 무려 64개나 들어있다.


그렇게 애써 만들어 놓은 표가 애초에 잡은 방향과 다른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럴 때 지난한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니 돌출된 값을 외면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생기게 마련이다. 물론 금할 일이지만. 저자 역시 자료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돌출된 자료 때문에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짐작하지 못했던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별개의 보론(補論)으로 언급하고 있다.


분석 과정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는 민족억압, 민족수탈, 민족차별, 민족말살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민족차별은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를 통한 ‘법적 차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구조적 차별’, 편견이나 혐오에 바탕을 두고 일상적으로 가하는 ‘관행적 차별’의 형태로 벌어졌다. 3.1운동 이후 ‘법적 차별’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구조적 차별’이나 ‘관행적 차별’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강화되었다. 식민지 한국인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의무교육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각종 사회ㆍ복지ㆍ행정법도 적용되지 않았으나, 식민 경찰의 즉결처분은 폭넓게 인정받았다.


이런 차별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중등학교, 그 중에 상업학교를 택해 자료를 전수조사하기로 하고 강경상업학교를 선정한다. 강경상업학교를 선정한 이유와 분석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등학교는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엘리트층이 모인 교육공간이어서 민족차별 논리였던 지적수준의 차이를 배제할 수 있다. (1944년 중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비율은 0.9%로 2015년 석박사 이상의 학력을 가진 비율 4.0%보다 월등히 낮다.) 그 중 입학경쟁이 매우 치열한 학교로서 양국 학생이 함께 공부하고 있어 입학과정의 차별을 파악할 수 있고, 졸업생의 취업비율이 높아 취업과정의 차별을 파악할 수 있고, 양국 학생의 비율이 비슷해서 평가의 신뢰도가 높은 학교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강경은 강경평야와 서해어장을 배후에 두고 있어 해륙 물산의 집산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번성한 곳으로, 대구ㆍ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 원산과 함께 전국 2대 포구에 손꼽히는 충남의 두 번째 도시였다.”


“1920년에 설립된 강경상업학교를 대상으로 해방 이전 졸업생과 중퇴생 1,489명(한국인 866명, 일본인 623명)의 학적부ㆍ교지ㆍ동창회 간행물ㆍ학생일기 등을 폭넓게 검토ㆍ분석했으며, 한국인 및 일본인 졸업생과 면담해 문헌자료의 제약을 보충했다.”


학생선발 및 교육과정의 차별


입시경쟁률은 한국인이 5~6:1인데 반해 일본인은 2:1에 불과했는데, 이는 입학정원을 민족별로 할당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한국인의 진학률이 현저히 낮았다. 시험과목에 일본어ㆍ일본사ㆍ일본지리가 포함된 것은 물론 다른 과목도 일본어로 시험을 치러야했으며, 면접시험으로 사상을 검열하고, 출신학교장이 학업성적ㆍ품행ㆍ가정형편을 기록한 소견표를 상급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그런 조건으로 전체 1,000점 만점에 소견표 200점, 면접시험 200점을 배점해 한국인을 차별한 것이다. 또한 입시요강에 일본인 지원자 우선합격에 관한 비밀조항도 들어 있었다. 게다가 입학사정에 수험생이 제출한 학부모 재산증명서도 평가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가정형편으로 중도에 퇴학할 염려가 있는 학생을 가리겠다는 명분을 들었지만, 이는 양국민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차별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인 학생의 입학성적이 일본인 학생보다 높은 것은 재학 중에도 계속 이어져 평균성적이 분석 대상 97개 학년도 중에서 95개 학년도에서 일본인 학생보다 평균 5점정도 높았다. 한국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보다 항상 뒤떨어지는 과목도 있었다. 수학ㆍ상업ㆍ지리ㆍ무도ㆍ교련 등에서 일본인 학생이 앞선 것이다. 이 중 수학과 상업은 점수 차이가 1점 내외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현직경찰이 가르치는 무도와 일본군 현역장교가 가르치는 무도ㆍ교련에서는 5~7점정도 차이가 났다. 실제로는 무도 대회에서 한국인 학생이 훨씬 더 많이 입상했고 양국 학생 대결에서도 한국인 학생이 훨씬 더 많이 승리했다. 그런데도 일본인 교사가 평가하는 무도와 교련에서 큰 점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상업학교의 취업을 좌우한 것은 품행평가를 근거로 작성한 학교장의 추천서였다. 품행평가가 낮을 경우 졸업을 할 수도 없었고, 졸업을 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웠다. 통계에 따르면 품행평가는 기본적으로 학업성적과 상관관계가 높았다. 그러나 양국 학생의 성적이 같은 경우에도 일본인 학생의 품행평가가 훨씬 양호했다. 품행평가는 징계ㆍ근태ㆍ성행평가로 이루어지는데 징계ㆍ근태는 일정한 근거에 입각했던 반면 성행평가는 일본인 교사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어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중등학교에서는 중퇴생이 무척 많았다. 강경상고의 경우 1920~1941년 사이의 중퇴율이 32.1%에 이른다. 중퇴는 신상으로 인한 자퇴와 징계에 의한 퇴학이 있다. 당시 한국인 학생 자퇴는 대체로 학자금 때문이었다. 수업료 뿐 아니라 각종 부대비용도 적지 않았고, 걸어서 다닐 수 있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등학교 이상은 읍이나 도시에 소재했던 탓에 시골에 살던 학생들의 하숙비 부담도 컸다. 이는 민족차별의 직접적인 결과로 볼 수는 없지만 정치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초래된 결과의 차별, 즉 구조적 차별인 것이다. 자퇴의 또 다른 한 축은 성적이 차지하고 있다. 성적이 낮은 일본인 학생의 자퇴가 많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일본인 교사의 판단으로 특별히 진급시켜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숫자가 적은 일본인 학생은 55회나 구제해주었음에도 자퇴율이 23.1%였고 구제 회수가 12회에 불과한 한국인 학생은 자퇴율이 10.7%였다. 퇴학은 품행으로 인한 것이 대다수였다. 앞의 통계로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품행으로 퇴학당한 경우는 한국인 학생이 훨씬 많았는데 주로 사상ㆍ운동이 그 이유였다. 물론 일본인 학생은 그런 사례가 전혀 없었다.


취업과정의 차별


조선식산은행은 한국인과 일본인 채용비율을 2:8로 정한 뒤 학교에 추천을 의뢰했다. 추천 받은 졸업생을 대상으로 전형절차를 밟아 채용 여부를 결정했는데, 이때 한국인 졸업생 중에는 탈락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본인 졸업생은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채용된 일본인 졸업생의 평균 성적은 한국인 졸업생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한국인 졸업생은 주로 금융조합에 취업했고 일본인 졸업생은 일반회사나 상점에 취업했다. 금융조합은 대체로 일본인들이 이사나 참사와 같은 임원을 맡아 지휘 통솔했고, 한국인들에게는 하급 실무를 맡겼다. 한국인이 소유한 은행이 별도로 존재했던 것도 금융기관에 한국인 졸업생 취업이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반면에 중등학력자가 필요할만한 자본과 규모를 가진 일반회사나 상점은 대다수 일본인 소유였고, 그래서 일본인 졸업생이 이런 곳에 많이 취업한 것이다. (한국인 학생들이 희망하는 직장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반회사나 상점이 손꼽혔고 이런 곳에서 실습한 학생도 많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일본인 졸업생을 채용했다.) 전체적으로는 일본인 졸업생이 오히려 한국인 졸업생보다 취업률이 낮았는데, 이는 부모나 형제의 가업을 보조ㆍ승계하거나 상급학교 진학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식민지사회의 불평등한 경제구조와 학부모의 경제적 격차에 의한 구조적 민족차별인 것이다.


결국 한국인 졸업생이 취업하기까지 일본인 교장과 교사의 추천, 일본인 졸업생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작동한 채용 쿼터, 불평등한 경제구조와 경제적 격차에 따른 구조적 차별을 뛰어 넘어야 했던 것이다.


교사에 의한 차별


한국인 학생 중 민족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을 당한 경우가 많은데, 놀라운 것은 민족차별에 가담한 것이 일본인 교사만이 아니다. 한국인 교사와 서양인 교사도 가담했고, 심지어 극심하게 민족차별 인종차별을 가해 학생들의 반발을 산 미국인 교장도 있었다. 특히 서양인 교사들은 한국 민족을 야만인으로 낙인찍고 학생들을 독단적, 전제적으로 지도했다. 이런 서양인 교사들의 한국관을 지배하던 것은 ‘문명 서양 대 야만 한국’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ㆍ기독교적 세계관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의 특성으로 ‘나태ㆍ빈곤ㆍ기생성ㆍ무능력ㆍ부정부패ㆍ정체ㆍ비위생ㆍ무종교’를 꼽았다. 이런 인식을 토대로 한국을 문명화하고 한국인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과 인종우월의식에서 교육선교 사업을 전개했다. 이때 이들에게 문명의 핵심은 기독교와 그 가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인 교사들은 한국 민족의 태생이 교활하고 거짓말을 잘한다거나, 사대사상에 젖어 의뢰심이 강하고 자립하려는 생각이 없다거나, 일본은 우월한 반면 한국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강조해 민족적 자기비하에 빠지게 하거나, 이를 통해 민족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일본인 학생에게 모든 일에 우선권을 부여했다.


법과 제도에 의한 교육 차별


잇단 조선교육령 공포로 식민동화교육이 강화될 때마다 교과과정의 민족차별성은 더 심해졌다. 한국어 수업시수의 비중은 1911년 11.7%에서 1922년 7.5%로 축소되고, 1938년 4.0%로 축소되면서 선택과목으로 전락했고, 1943년에는 한국어 과목이 교과과정에서 아예 사라졌다. 반면 일본의 도덕ㆍ역사ㆍ지리ㆍ일본어 교육은 계속 중시되었다. 황국신민이 될 기백을 함양하려는 목적의 체조ㆍ교련ㆍ무도의 수업시수는 1938년 주당 3시간에서 5시간으로, 1943년에는 7시간으로 늘어났다.


일반계 공립학교가 일본인 위주로 설립되어 1934년 일본인 중학생은 1만 명 당 186.7명인데 반해 한국인 중학생은 6.8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교사 중 일본인이 88.0%였고 한국인은 11.9%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 기록물로서 이 책의 가치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내 세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 억압과 차별의 역사에 익숙하고 이와 관련한 책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학계의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만 지금 세대에겐 이미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박제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 세대만큼 관심도 없고, 그러니 연구 성과가 책으로 출간이 된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자책 출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보고서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았으니 이 책을 펴내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수고가 얼마일지 대충은 짐작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저자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정리해놓지 않으면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 세대쯤이면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통이 그저 역사물의 한 장면 정도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까지 멀리 볼 것도 없다. 반일의 기치를 내건 인사들 중에 우리 민족이 당한 억압과 차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는지 모르겠다.


훗날 우리 민족이 당한 억압과 차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도, 허황된 논리로 일제강점기 역사를 한낱 정치적 수사로 전락시킨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이것이 남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임을 잊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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