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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01. 2022

<소설> 서교동에서 죽다

가난이란 사물의 적절한 상태로부터 버려지는 것

고영범

가쎄

2021년 10월 31일


1974년 광복절에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그 시간에 나는 경춘선을 타고 대성리 어디쯤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날 술이 덜 깬 채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는데 시끌벅적할 기차 안에 낯선 정적이 흘렀다. 승객들이 나지막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전날 육영수 여사가 총격으로 서거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시간에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국민학교 6학년 진영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던 사이클을 타고 엑스플로74가 열리던 여의도 5.16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 어머니와 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의 어머니,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 주인공의 큰 형과 내 누이동생 또래인 주인공의 누나, 거기에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극동방송국 앞을 지나 상수동으로 향하는 길. 이제는 박제로 남아있는 70년대 중반의 어느 날을 떠올리는 이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건 흡인력 있는 그의 글보다는 이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이 일 년 동안 어머니를 졸라 갖게 된 사이클을 타고 상수동으로, 여의도로, 다시 제2한강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스무 쪽 넘게 이어진다.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그 내러티브를 아무런 저항 없이, 한눈팔지 않고 따라갈 만큼 그의 글은 흡인력이 있었다.


소설 첫 머리를 읽으면서 맥락 없이 성석제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막연하던 것이 주인공 진영이 사이클을 타고 가다 지나는 트럭 운전기사에게 ‘사람과 가까이 사는 네 발 달린 포유류 중 어린 개체를 지칭하는 말’을 들었다는 표현을 접하면서 이야기꾼 성석제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틀리면 말고. 그러다 소설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발문’에 이 소설의 작가 고영범이 ‘연세문학회’의 막내쯤 되고 성석제가 좌장 격이었다는 글을 읽고 무릎을 쳤다. 짐작이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짐작한 내가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주인공 진영과 같은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여긴 모양이다. 책에는 작가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고만 적혀 있고 그게 어딘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비록 이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은 아닐지언정 나는 단연코 서교동이 작가의 고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십 년 전 그 동네 상황을 그렇게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할 수는 없는 일이고, 게다가 소설의 현장에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 모두 사실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진영의 가족이 1년 반 남짓한 시간동안 겪은 몰락의 과정을 수사(修辭)를 최대한 억제한 채 열세 살 주인공의 눈높이에서 건조하게 서술한다. 등장인물의 감정 또한 수사보다는 상황으로 사건으로 풀어낸다.


주인공 진영은 집에 냉장고가 있었고, 어머니 결정으로 사이클을 살 수가 있었고, 비록 어머니가 아버지 병간호 하느라 들이기는 했어도 식모 누나가 있을 만큼 넉넉하게 살았다. (당시 냉장고는 아무 집에서나 들여놓을 수 있는 세간이 아니었다. 소설의 시점쯤에 복학한 선배가 중간고사 시험 준비하러 자기 집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시원한 김치를 먹고 놀란 기억이 있다. 오뉴월에 시원한 김치를 가능하게 만든 요술방망이가 냉장고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진영의 아버지는 버스회사에 버스를 들여놓은 차주였는데, 동료 차주들에게 추대되어 사장으로 일하던 중에 깊은 병을 얻는다. 보험이 없던 때에 일어난 사고로 집은 물론 세간까지 차압당한 채 한 순간에 전락해 오랫동안 살던 안락한 서교동을 떠나 황량한 화곡동에 둥지를 튼다. 모든 것은 어머니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이미 돌보아야 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게를 열고 생계를 돌보는 동안 아이들은 생계를 위해 짐을 나눠져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국민학생인 진영과 동생 진수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은 방치와 일탈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가게마저 접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 않아도 병이 깊어 누워있던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몸에 좋지 않다는 음식만 골라 먹는 것으로,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포기해 나간다. 작가는 이 순간을 “무언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듯한 느낌. 뜨거운 것은 미지근해지고 차가워야 할 것도 미지근해졌다. 온도가 변하면 질감이 변하고, 냄새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맛도 변한다. 그런 상태가 오래 가다 보면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가 생각보다 깊고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고 묘사한다. 그러면서 “가난이란 서로가 서로로부터, 그리고 사물의 적절한 상태로부터 버려지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라고 오금을 박는다.


한 순간에 들이닥친 가난이 아이에게 실감날 리 없었다. 세간도 없이 화곡동으로 이사 가고, 만원버스에서 내리지 못해 지각하게 되자 마녀 같은 담임선생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동생을 데리고 만화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런 날을 열흘 가까이 보내도록 작가는 아이의 눈으로 일어난 사실만 건조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몰락이, 가난이 아이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어가 종국에는 아이가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가 생각보다 깊고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읽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도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작가가 <서교동에서 죽다>에서 말하는 죽음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소설이 누군가 죽은 것으로 결말을 맺었건 그렇지 않았건 굳이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닐지 모른다. 작가는 한 아이가 겪은 상황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몰락과 가난을 기억하게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 갔을지 상상할 수 있도록 결말을 열어놓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그때는 모두가 다 가난했다. 그렇다고 가난의 크기가 모두 같은 건 아니었다. 진영은 중학교 입학 전날 어머니 친구 집에서 교복을 얻어 입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나는 오직 자식에게 한 끼를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우리 형제를 업고 걸려서 험악한 고려대 뒷산을 넘어 제기동 친구네 집을 찾았던 어머니가 부끄럽기는커녕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을 뿐이었다. 그런 나도 이 나이 되도록 잘 견뎌왔다. 그러니 이제는 환갑을 넘겼을 진영과 그 형제들도 그때 박힌 굳은살로 얻어낸 평온 속에서 간혹 옛 생각을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어머니 몰래 몸에 좋지 않다는 음식만 골라 먹는 것으로, 그런 아버지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포기한 진영의 아버지 어머니 마음이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을 묵직하니 누른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보물찾기처럼 꽁꽁 감춰놓고 독자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꼼꼼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 짚자면, 소설 첫머리에서 진영이 새로 산 사이클을 타고 달려 내려간 “홍대 정문에서 극동방송국을 지나 상수동 사거리에 이르는 길은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포장도로고 게다가 내리막길”이 아니라 극동방송국까지만 내리막이고 그곳 조금 지나서 상수동 사거리까지는 오르막이다. 브레이크를 온전히 밟고 있지 않으면 차가 뒤로 밀릴 정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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