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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06. 2022

영국인 재발견

영국과 영국인

권석하

안나푸르나

2013년 10월 12일


영국을 어떤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까? 신사, 귀족, 민주주의, 프리미어리그, 셰익스피어, 처칠, 그리고 BBC 정도가 아닐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로얄알버트홀의 프롬스 축제,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코벤트가든의 오페라, 하이드파크 나들이, 거기에 고성에서 숙박하는 것 정도를 덧붙일 수 있겠다. 결국 이 모든 단어는 전통과 문화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저자가 젠틀맨은 삼 대가 걸린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문득 예전에 들었던 농담이 생각난다. 영국에 와서 잘 가꿔놓은 잔디밭을 본 미국 부자가 저렇게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단다. 잔디밭 주인은 돈은 얼마 안 들고 그저 시간이 삼사백 년 걸릴 뿐이라고 했더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전통과 문화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서유럽 3국을 동양 3국과 즐겨 비교한다. 영국은 중국에, 독일은 일본에, 프랑스는 한국에 대비시킨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대비를 듣는 순간 바로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그 예로 지나가던 차가 길거리에 세워둔 차와 부딪쳐 흠집을 내고도 제대로 연락처를 적어놓지 않고 가면 독일은 누군가 어디서 보고 반드시 신고하고, 프랑스는 주인도 없으니 그냥 가라고 부추기고, 영국은 남의 일이니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고 영국인이 무책임하다는 말은 아니고, 태생적으로 소동을 싫어하는 그들의 성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례가 아닌가 한다.


영국에서는 새치기 자체를 보기도 어렵지만, 누가 새치기해도 누구 하나 나서서 지적하지 않는단다. 심지어 그 행동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봐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을 별것 아닌 일로 소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여겨 좋게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당한 일을 방치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그냥 넘어가지만 반드시 정식으로 항의해서 그런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거나,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혹은 정당ㆍ단체ㆍ협회 같은 곳을 통해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떼거리로 몰려가서 냄비처럼 파르르 끓다가 그 자리를 떠나면 바로 식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장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지만 돌아서서 끝내 책임을 묻는 영국인. 목소리를 높이거나 떼거리로 몰려가서 냄비처럼 파르르 끓는 국민으로서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등줄기가 서늘하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이니 서로 등에 칼을 꽂는 소송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파티에서 만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대화하며 웃고 떠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은 그게 성숙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인은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서 당사자가 직접 나서는 법이 없다고 한다. 당사자끼리 직접 대화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감정싸움이나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제삼자를 개입시켜 막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소동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떠들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면 승무원을 통해 이야기하고, 식당에 갔는데 음식에 문제가 있을 때 종업원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먹고는 다시는 가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히 자기 경험을 털어놓아 손님이 끊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감정낭비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잘 처리하는 것 같아 부럽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고단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요즘 우리 사회도 이런 방향으로 달라져 가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층간 소음으로 인해 불편해진 노부부가 조용히 해달라는 메모를 남겼더니 경비원을 통해 대답하고, 누수가 일어났으니 조치해달라는 부탁에는 문자로 보험회사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국의 귀족 문화, 상류층 문화는 참 본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와는 달리 영국 상류층은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인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저자는 뜻밖에도 영국 상류층은 굳이 밤새워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매달리는 것은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비난하지도 않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탈세나 탈법, 혹은 특혜를 통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영국에서는 부당한 독점이나 갑의 위치를 이용한 횡포를 통해 돈을 버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영국인이 성숙해서라기보다는 영국이라는 사회와 갖춰진 제도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나 싶다. 이와 같이 부당하게 돈을 버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우니 돈 많은 상류층들이 자기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던 상관하지 않는단다. 말하자면 상류층을 질시하는 건 단지 그들이 이룬 부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과연 이유가 그것뿐일까?


영국이라고 모든 상류층들이 존경받는 건 아니다. 부자가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번 돈을 내놓는다고 해서 누구도 그것을 자선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부자가 존경을 받으려면 돈을 잘 써야 하는데, 영국에서는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돈 버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이 기부한 금액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높은 신분에 어울리는 고귀한 의무’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한동안 회자된 일이 있었다. 웬일인지 요즘은 그마저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아직도 영국에서는 그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건 상류층으로 충분하고 자기들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체제와 계급에 충실한 삶을 꿈꾼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상류층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상류층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기꺼이 그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수용할 마음도 있다.


저자는 상류층과는 달리 일반적인 영국인이 바라는 행복한 일생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고 이야기한다.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커서 학교 다니고, 졸업한 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다 늙어서 은퇴하고 죽어 평생을 같이한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다니던 동네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행복이란 일상에 있는 것이니, 큰 꿈을 꾸지 않거나 아예 안 꿔서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는 직업이 무엇이든 큰 차이가 없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그들은 이사하는 일을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이 아니라 공포로 여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영국인들은 이사하는 걸 거의 실직이나 이혼, 혹은 파산 정도의 두려움으로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평생 함께한 이웃과 친구들을 두고 어딘가로 옮겨서 새로 누군가를 사귀는 일이 숫기 없는 그들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 자체가 변화요 역동인 우리에겐 매우 낮선 이야기이지만.


몇 번 가보지 않았지만 영국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쾌적한 호텔에서 머물 수 있는 돈으로 런던에서는 여인숙을 겨우 면할 정도의 호텔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인은 중고가게에서 옷을 사 입고 벼룩시장에서 중고 물건을 사고판다.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만 사서 읽는다. 가전제품이나 보일러, 자동차는 으레 스스로 고친다. 저자는 이런 모습이 검소해서도 아니고 수리하는 일을 즐겨서도 아니라 워낙 물가가 높아서 가처분 소득이 적은 일반인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자기 의사를 조리 있고 분명하게 표현하지만, 우리 세대만 해도 대중 앞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건 특별한 재능으로 여겼다. 학교교육이 입시에 치중되어 있다 보니 그런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요즘 소셜미디어처럼 자기 의사를 표출할만한 창구도 없었다. 저자는 영국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는 토론과목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생각을 버리는데 중점을 둔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학생의 생각과 무관하게 찬반 팀을 배정하고, 때로는 토론하는 도중에 갑자기 진영을 바꾸고 상대와 전혀 다른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과 다른 주장을 펼쳐야 할 때를 대비한 것이 아닐까 해석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겠다. 하지만 나는 자기 의사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상대를 설득하다 보면 자기 논리의 모순을 더 잘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상당히 고차원적인 교수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영국을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여긴다. 은연중에 일사불란한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내게 영국 정치는 정신없고 때로는 혼란스럽다. 그렇기는 해도 영국 야당은 ‘그림자 내각’을 두고 중요 국정의 구체적인 부분을 지속적으로 챙기고 있다. 물론 집권당 전문가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국정의 구체적인 부분을 지속적으로 챙기고 있으니 집권하게 되었을 때 저자 말대로 신인이 혜성 같이 등장하기도 어렵고 새로 각료가 된 의원이 미처 현안을 챙기지 못해 답변을 미루는 변명이 통하지도 않는다. 요즘처럼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는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정치구조를 가졌다면 의사결정 과정이 합리적이고 매끄러워야 할 것이고 결과물도 좋아야 하지 않을까? 정치에 문외한이니 내게 영국 정치의 수준을 판단할 소양은 없다. 그렇기는 해도 이번에 브렉시트를 주장하고, 그것을 국민투표에 붙이는 과정과 저자가 설명한 영국 정치의 수준과 기능이 영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글을 읽기 시작한 건 아마 십 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칼럼을 보면서 영국에 대해서, 영국인의 생각과 생활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저자의 글을 읽게 되고, 친구가 되고, 그가 영국에 관해 쓴 책이 한두 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아서 휴가 올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책 마다 오백 쪽이 넘고 어떤 책은 칠백 쪽에 이르기도 하는 벽돌책이어서 늘 순위가 밀렸다. 휴가 때 그렇지 않아도 수하물량이 넘친다고 걱정하는 아내에게 그 책을 넣어오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울에 오고 나서도 몇 번을 벼르다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일단 쉽게 읽힌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것으로 여길 만큼. 그러다 보니 책을 손에서 떼지 못했다.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읽기 편하다고 책을 끝까지 몰입해서 읽는 건 아닐 것이다. 내용도 풍부하고,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영국의 속살을 자세하게 헤집어 보여주고 있다. 무려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을 이제야 읽은 게 민망하지만, 이것으로 십 년 독자의 의무를 하나 끝낸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저자는 지난해 <두터운 유럽>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영국인 재발견 2>에 앞서 그 책을 먼저 읽어볼까 한다. 이 책 머리말에서 언급한 ‘서유럽3국 동양3국 비교’와 “독일은 할 수 있다고 규정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네거티브 시스템인데 반해 영국은 금지하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포지티브 시스템”이라는 저자의 평가를 머릿속에 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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