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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04. 2022

필요의 탄생

냉장고의 역사

헬렌 피빗

서종기 번역

푸른숲

2021년 1월 21일


주부들의 수고를 혁명적으로 덜어준 것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각종 가전제품을 꼽을 것이다. 앞서 <세탁기의 배신>에서 세탁기가 주부들의 수고만 덜어준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성을 부엌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을 언급한 일이 있다. 물론 제목 그대로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세탁시간이 늘어났다는 역설적인 결과가 생겨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세탁량이 같다면 세탁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언젠가 우리보다 한 세기쯤 앞서 산 주부들이 현대 부엌을 보고 가장 놀랄만한 것이 무엇이겠냐는 질문에 수도와 가스렌지일 것이라고 대답한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고 산에서 나무를 해 와야 식사를 준비할 수 있던 옛날 아낙네들이 부엌에서 들어오면 무엇보다 물이 콸콸 쏟아지고 언제든 편안하게 불을 피울 수 있는 걸 가장 신기하게 여길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부의 수고를 덜어주고 나아가 생활 양상까지 바꾸어 놓은 가전제품으로 냉장고를 들 수 있겠다.


아주 귀국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시 거주를 위해 외국에 나아갈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지내다 보니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음식 하나 제대로 해먹기가 어렵다. 임시변통으로 용량이 작은 냉장고를 가져다 놓다 보니 시장을 보아오면 곧 가득 차서 식품 고를 때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제약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덕분에 쟁여놓던 버릇도 고치고 낭비도 많이 줄였다. 냉장고 용량 하나가 줄어들었는데도 이러하니 냉장고가 없을 때는 생활방식이 또 얼마나 달랐을까.


냉장고가 편리하다는 걸 처음 깨달은 건 대학 다닐 때였을 것이다. 친구 집에 중간고사 시험 공부하러 갔는데 오뉴월이었는데도 그때까지 김장김치가 어찌나 맛있고 시원했던지, 그날 느꼈던 놀라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김장한 것을 땅에 파묻은 김장독에 저장했기 때문에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시어져서 먹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냉장고가 보급되자 김장김치를 오뉴월까지도 보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때쯤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키우게 되었는데 (관심을 두지 않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그것 때문에 주부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양상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냉장고가 개발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술한 이 책에서 저자는 “냉장고가 일상적인 가전제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선택할 수 있는 식품의 폭이 넓어지고 열대과일의 수요도 늘어났으며, 냉장고가 일찍 개발되었다면 아마 베이컨ㆍ체다 치즈ㆍ훈제생선ㆍ건포도ㆍ잼과 같은 저장식품이 개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저온저장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식품을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한 저장방식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구축된 저온유통체계(cold chain)로 인해 육류ㆍ생선ㆍ유제품 유통이 늘고 이어서 계절적ㆍ지역적 제한이 많은 과일과 채소의 유통이 늘었지만, 이로 인해 가격 지배권을 잃게 된 현지 생산자들이 반발했고, 신선한 육류를 공급하던 생산자들이 수입육ㆍ냉동육을 반대했다고 이야기한다.


냉각기술의 총아인 냉장고는 냉각기술 개발 초기부터 상용화된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가정용 냉장고를 주방의 필수요소로 받아들인 건 50년 전에 불과하고 미국도 80년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에는 얼음을 채워 넣은 아이스박스로 식품을 저장했다. 이를 위해 한겨울에 호수에서 얼음을 채취하기도 하고, 30센티미터 정도 두께로 다진 눈 사이사이에 짚더미를 깔고 켜켜이 쌓아 얼음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얼음은 저온창고나 지하저장실에 보관했다. 미국 보스턴 출신의 프레더릭 튜더라는 사람은 미국과 노르웨이에서 얼음을 채취해 영국과 유럽으로 수출해 ‘얼음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이를 위해 항구에 저온창고를 지었다. 최대 얼음 공급업체인 그의 회사가 1806년에 공급한 얼음은 130톤 정도였는데 50년 후에는 무려 14만6천 톤에 이르렀고, 최대 운반거리는 5천 킬로미터가 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공급된 얼음이 쌌을 리 없으니 처음에는 부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얼음의 편리함이 알려진 이후로 사용량이 차츰 늘어 많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았다. 이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히 얼음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드디어 제빙기술이 개발되었다.


제빙기가 처음 선보인 곳은 1862년 만국박람회였고 1934년 박람회에 이르러서야 가정용 냉장고가 등장했다. 당시 제빙기술이나 냉장고가 환영만 받은 건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신이 창조한 얼음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얼음이 ‘신을 향한 도전이고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냉소와 불신의 대상이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빙기는 가정용으로 쓰기에는 여러 불편함이 따랐기 때문에 제빙기가 선보인 이후 냉각기술을 개발하는데 치중하게 된다. 냉각기술을 이용한 냉장고를 선보인 1934년 박람회에서는 전시와 함께 냉각기술이 얼마나 부패속도를 늦추는지, 어떤 식품을 어떤 온도로 저장해야 하는지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냉장고는 부피도 크고 무엇보다 소음이 심해서 이후 전기모터를 이용해 냉매 압축하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냉장고로 개선되었다. 1913년 당시 개발된 초기 냉장고 가격은 포드 자동차 가격의 두 배에 이르기도 했다.


저자는 냉장고 개발을 서두른 쪽은 저장업체나 식품업체가 아니라 전력회사였다고 이야기한다. 전기 보급 초기에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않아 1933년 전력보급률이 32%에 불과했는데, 특히 전기사용량이 적은 낮 시간에 전기 수요를 늘리기 위해 가전제품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냉장고의 바탕이 되는 냉각기술은 부패하기 쉬운 온갖 상품의 보전법과 수송방식을 바꿔 19세기부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냉장고가 소형화 고급화되면서 주방으로 진입했고, 이로 인해 주택 내부구조와 공간 활용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당시 모델하우스에 냉장고가 기본 구성품으로 들어있었으며 이를 위해 부엌에 전기설비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쯤 중앙난방이 이루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집안에 저온의 식품저장실을 두기가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냉장고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통계에 따르면 1970년대 영국의 주택 실내온도가 12도 정도였던 것이 2004년에는 18도로 높아졌다.


냉장고 보급률은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17%에 불과했던 영국의 냉장고 보급률은 1965년에 이르러 56%로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에 있었던 기록적인 폭염 뿐 아니라 이전 10여년에 걸쳐 여성 취업률이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1970년대 가정 요리의 삼위일체로 슈퍼마켓ㆍ냉장고ㆍ전자레인지를 꼽는다면서, 이로 인해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주부들의 사회 진출을 촉진시켰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전제품은 주부의 가사노동 뿐 아니라 생활양식 자체를 바꾼다. 냉장고로 인해 식품 보관방식만 달라진 게 아니라 차가운 요리(Cold Cookery)라는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기도 했다. 기업에서 냉장고를 건강을 지키는 제품으로 홍보하기 시작하면서 보존을 위한 식품첨가물은 해롭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세탁기의 배신>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가전제품이 유익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냉장고 역시 다르지 않은데, 냉장고가 일상생활에 들어오면서 식품을 쌓아두는 악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는 언제 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상해서 버리는 음식이 늘어났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작은 용량의 냉장고를 쓰다가 최근에 제대로 된 냉장고를 들여놓았다. 더운 곳에서 살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지 요즘 인기 있다는 대형 냉장고를 샀는데, 어찌나 큰지 사다리차를 동원하고 사람도 몇이나 붙어서 겨우 들일 수 있었다. 작은 냉장고를 쓰다 봐서 그런지 엄청나게 커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이 냉장고조차 가득 차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다. 말하자면 냉장고로 인해 식품 저장방식이 달라져 식품을 많이 사들이고, 저장할 식품이 많아지니 냉장고가 커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냉장고가 환경 위해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전에 냉각재로 사용하던 암모니아ㆍ이산화황ㆍ염화메틸은 중독의 위험이 있어 프레온가스로 대체되었는데, 프레온가스는 오존층 파괴의 주범으로 작용한다. 산술적으로는 슈퍼마켓 한 곳에 설치된 냉장고에 들어있는 프레온가스는 항공기가 영국-호주를 3천 번 왕복할 때 배출하는 양과 같다.


물론 그렇다고 냉장고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냉장고가 일상생활에 낭비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 환경에 크게 위해를 끼친다는 점을 기억하고 사용을 절제할 필요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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