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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13. 2022

라틴어 수업

유럽 언어의 기원

한동일

흐름출판

2017년 6월 15일


2017년 출간되어 무려 100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한 번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 아니라 “라틴어의 체계, 라틴어에서 파생한 유럽의 언어들을 시작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ㆍ사회제도ㆍ법ㆍ종교를 포함해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겨 있다”는 출판사의 소개문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 뿐 아니라 저자가 쓴 후속편인 <믿는 인간에 대하여>까지 함께 서가에 담아놓았다.


이 책은 저자가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한 초급ㆍ중급 라틴어 수업을 정리한 것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라틴어라는 언어에 대한 소개를 건너뛰었다. 라틴어를 수강하려는 학생들과 달리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으면 좋았겠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고대 로마와 그 주변 지역 라티움(Latium)에 정착한 라티움 사람들이 쓰던 언어로서, 로마가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지중해 전역과 유럽 지역의 상당 부분으로 퍼져나갔고, 오늘날 사어(死語)가 되었지만 이탈리아어ㆍ프랑스어ㆍ스페인어ㆍ포르투갈어ㆍ루마니아어의 근원이 되었으며,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들도 라틴어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영어는 인도유럽어 중 게르만어군에 속하지만 전체 어휘의 60~70%가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라틴어가 이와 같이 과거의 언어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라틴어는 서양 세계의 지식인 사이에서 살아남았는데,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를 채택한 것도 이에 큰 몫을 했다. 그래서인지 지식인 집단에서 라틴어 모토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최근에 소위 ‘1만인 서명’으로 정치 현안에 빗대어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어 한 어느 학교의 교훈이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이기도 하다.


저자는 라틴어가 “몹시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언어이어서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준다”고 말한다. 동사와 명사의 변화가 백수십여 개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한데, 그 때문에 한 번 라틴어에 도전해볼까 싶던 마음이 쑥 들어갔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어에 도전한다고 해서 다 늦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겠다는 건 아니었다. 영어 어휘의 상당수가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이다 보니 라틴어를 이해하면 영어 어휘력을 늘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특히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학술용어가 생겨나기까지 과정을 유추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은퇴 후에도 지력을 유지하고 나름 지적 유희로 괜찮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라틴어에 흥미를 갖도록 마련한 강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포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책을 읽었는데, 저자는 라틴어에 직접 관련된 내용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학생들이 이 강의를 단순한 라틴어 수업이 아니라 종합인문수업에 가깝게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 이야기를 기대했기 때문인지 읽는 내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라틴어의 특징으로 무엇보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는 수평성을 전제로 한 언어’라는 점을 꼽는다. 과거 로마가 스페인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지만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로마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한다. 로마는 식민지 출신 중 우수한 인재를 사회 전반에 기용하고, 이들을 로마제국의 경영ㆍ경제ㆍ군사 분야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사고의 틀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들의 사고와 태도에 근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사례로 저자는 대학의 성적평가방식을 꼽는다. 유럽 대학에서는 성적평가에 라틴어 최우등(Summa cum laude), 우수(Magna cum laude), 우등(Cum laude), 잘했음(Bene)과 같이 모두 긍정적인 말로 표현하는데, 이렇게 평가한다면 학생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기 위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발전하는데 의미를 두게 되고, 그 결과 남보다 잘하는 게 아닌 전보다 잘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니, 결국 학생의 가능성을 현재 기준으로 평가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영화 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틴어 문장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꼽을 수 있겠다. 흔히 오늘을 즐기라는 말로 인용되는데, 저자는 이 문장에서 말하는 즐길 대상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의존해 살라는 게 아니며,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 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소모한다”고 탄식한다. 그런 저자의 탄식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카르페 디엠’의 뜻을 바르게 깨달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설명한 문장 중에 유독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로마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으로,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라는 말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보니 여상히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자는 매 장마다 라틴어 문장을 몇 개씩 소개하고 있지만 그 중 “Hoc quoque transibit(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외워두었다. 모두가 익숙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굳이 라틴어로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저자도 “라틴어를 공부하면 남 앞에서 현학적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며 “비웃을 수도 있지만 남들이 모르는 걸 내가 안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도 상당히 크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나중에 한 번 잘난 체 할 때 써먹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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