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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7. 2022

초대 기독교와 복음서

다양성을 품은 정경

김득중

KMC

2016년 2월 22일


오랫동안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구원을 얻는 길이 믿음인가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교회의 오랜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고민 끝에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는 하지만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으므로 결국 믿음과 행위가 모두 필요하다”는 어정쩡한 결론으로 문제를 봉합했다.


<초대 기독교와 복음서>라는 제목에서 ‘초대교회와 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서술하는 책일 것으로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다. 짐작했던 대로 초대교회는 ‘유대기독교(Jewish Christianity)’에서 ‘이방기독교(Gentile Christianity)’를 거쳐 ‘초기공교회(Early Christianity)’로 발전했다는 설명이 앞서나왔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하게 연결된 것은 아니고, 이방기독교가 ‘예루살렘 공동체(유대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새로운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이질적이어서 두 공동체 사이에 상당히 격렬한 충돌이 있었고 그런 내용이 그대로 신약성경에 녹아있다는 설명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저자는 이 세 단계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대기독교’는 주로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교를 믿다가 나중에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 시작한 이들로 이루어졌다. 자신들이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종파라는 생각을 갖지 않은 채 계속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그래서 유대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향은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에 주로 나타난다. 이들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위해 보낸 존재로서, 예수의 신성보다는 다윗의 자손ㆍ랍비ㆍ선지자ㆍ메시아라는 인성을 강조하고, 율법의 완성을 언급함으로써 율법의 계속성을 강조하고, 바울을 무시하거나 배격하면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숭상한다. 일부 복음서에서 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양자기독론(養子基督論, Adoptionistic Christianity)은 이를 예수가 본래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로 인정받고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이방기독교’는 바울이 세운 이방교회에 합류한 개종한 이교도로 이루어졌다. 요한복음과 로마서는 예수를 죽인 것이 유대인이며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반 유대교적, 반 율법적 성향을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방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인 스데반과 빌립이 유대 당국으로부터 박해받을 때 열두 사도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들은 복음은 유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자기를 낮춰 이 땅에 오신 신성을 강조하고, 예수가 오심으로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면서 율법의 행함보다 믿음을 강조한다.”


“‘초기공교회’는 초대교회 때 그토록 강렬했던 임박한 것으로 믿었던 종말이 마냥 지연됨에 따라 종말에 대한 기대가 눈에 띄게 퇴조한다. 믿는 이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던 교회가 제도화ㆍ조직화 되고 신앙은 점차 교리화(敎理化)ㆍ신조화(信條化)한다.”


저자는 초대교회가 세 단계를 거쳐 형성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했다는 증거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놓고 언쟁을 벌이다 갈라선 사건을 예로 든다. 바울이 바나바와 갈라선 것은 과거 선교여행에서 이탈한 마가를 다시 선교여행에 동행시킬 것인지 다투었기 때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율법의 요구에 대한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나바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 먹는 일에 자유로웠던 바울과 분명히 달랐고, 율법에 진보적인 바울은 율법에 보수적인 바나바를 베드로와 싸잡아 비난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니, 두 사람의 충돌은 마가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기조에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충돌은 신약성경 곳곳에서 확인된다. 저자는 이방기독교의 슬로건인 ‘오직 믿음(by faith alone)’을 주장하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때문에 잘못된 신앙풍조가 생겼으며, 유대기독교에서 이에 반발해 ‘믿음으로만은 아니라(not by faith alone)’는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를 기록했다면서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만을 강조하면서 율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마태는 도리어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의 일점일획까지도 다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하며,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며 바울을 공격한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며 행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 실제로 아무런 믿음의 열매나 행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향을 반박하고, 그 결과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이방교회의 도덕적 혼란이 초대교회에 같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내가 오랫동안 가져온 “구원을 얻는 길이 믿음인가 행위인가” 하는 질문은 초대교회가 심각한 충돌을 겪으며 형성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쟁점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쟁점의 또 다른 면을 파고든다.


저자는 바울은 토라를 그리스도로 대치해 ‘아버지를 믿는 종교(the Jewish Father religion)’에서 ‘아들을 믿는 종교(the Christian Son religion)’로 바꿨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오직 토라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예수를 ‘목수이자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으로 여긴 것을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과 동격이며 동질인 존재’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레자 아슬란은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킨 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질문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비록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을 확대하고 재구성한 것일 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초대교회가 ‘오직 믿음’만 강조하는 바울서신과 ‘행함과 선행’을 강조하는 마태복음이나 일반서신들을 나란히 정경으로 확정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는 바울의 신앙과 확신을 인정했다는 의미이자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라며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를 정경으로 확정하는 작업은 기독교 신앙이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이 전적인 주관에 달려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책임과 노력도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용할 수 없는 다양성의 한계를 규정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인정하지만 에비온복음은 인정하지 않고, 요한복음은 인정하지만 도마복음은 인정하지 않고, 사도행전은 인정하지만 바울행전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초대교회가 오직 하나의 규범적 형태(no single normative form of Christianity)만 갖고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예수에 대한 동일한 신앙이 사람과 지역과 환경에 따라 서로 보충하며 때로는 충돌하며 다른 형태로 고백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랫동안 가져온 “구원을 얻는 길이 믿음인가 행위인가” 하는 질문은 신앙적 다양성을 도외시한 단선적인 질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초대교회의 이런 충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충돌하는 견해를 모두 정경으로 담은 성경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라는 다양성이라고 결론짓는다. 양자택일의 논리가 사회 전반을 압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런 결론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른다.


유대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이방기독교가 괜한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기독교가 아니었더라면 기독교는 아마도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지 못한 채 유대교식 메시아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의 한 종파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이후 이방기독교인들이 유대기독교인들보다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유대교적인 특징을 탈피하고 기독교적인 세계적 종교로 발전했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인용한 R. E. 브라운의 발언은 다양성이 더욱 요구되는 지금 매우 적절한 관점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교회는 대체로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는 급진주의자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기독교역사를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이단은 급진주의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에 대해 기존의 대답을 고수하는 소위 정통(orthodoxy)이라는 보수주의자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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