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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6. 2022

5.16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과 대응

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NCC)의 정치적 활동을 중심으로

강성호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6호

2022년 3월 25일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럽다 못해 죄인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한국기독교 흑역사>라는 책이 발간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터여서 몇 년을 벼르다 올해 초 비로소 읽었다. 곧 그 책에 매료되었고 자연스럽게 저자의 다른 저서를 찾게 되었다. 지난 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을 읽었고,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한국 현대사와 개신교>를 읽으려고 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러던 중에 저자의 페이스북에서 저자가 한국기독교역사학회에서 발간한 <한국기독교와 역사>라는 논문집에 한국기독교 현대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논문을 받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탁에 저자는 선뜻 자신이 발표한 <5.16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과 대응>이 실린 논문집을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울러 역사문제연구소의 논문집인 <역사문제연구> 제45호(2021년 4월)에 실린 ‘1950년대 한국 개신교 선거운동의 주도세력에 대한 연구’라는 저자의 논문 별쇄본도 함께 보냈다.


논문은 그저 관심 있다고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읽고 평가하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혼자 읽고 묻어두기엔 너무 아깝고 나름 읽으면서 궁금하거나 소감이 없을 수 없어 읽은 것을 요약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가. 논문 요약


1) 5.16에 대한 지지


5.16이 발생하자 한국기독교연합회(NCC, National Christian Council)에서는 교계 지도자 긴급회의를 열어 ‘혁명공약’에 제시된 대로 “군사정부가 조속한 시일 내에 혁명공약을 이루어 혁명정신을 계승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조건부’로 이를 지지했다. 강원용 목사는 원칙적으로는 무력에 의한 군인들의 쿠데타를 결코 지지할 수 없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그가 견지하고 있었던 라인홀드 니버의 “선택 대상이 선과 악이 아니라 둘 다 악일 때는 보다 적은 악(lesser evil)을 택하라”는 기독교 윤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장면 정권의) 무질서와 (5.16 군부세력의) 독재라는 두 가지 악 중에서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2) 5.16 지지 배경


○ 군부의 기독교 인맥


5.16을 주도한 군부세력의 핵심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김윤근 해병여단장을 비롯한 기독교 인사가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은 한경직 목사가 담임한 신의주교회 교인이었고, 월남해서는 영락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장인이 영락교회 장로였다. 1952년 육군훈련소장으로 부임해 군인교회를 세우며 교계의 주목을 받았고 본인도 자주 출석해 1950년대 중반부터 ‘신앙의 장군’으로 알려졌다. 5.16을 성공으로 이끈 해병여단장인 김윤근은 거사를 앞두고 군목에게 무혈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남로당 조직원이었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 가톨릭정권에 대한 반발심


식민지시기에 가톨릭 지식인으로 활동한 장면이 민주당 정권을 이끌게 되면서 한국가톨릭은 장면 정부에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를 보냈다. 장면은 부통령 시절 매주 공관에서 신부를 초청해 미사를 드렸으며, 많은 정치인들을 가톨릭에 입교하도록 인도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는 장면 정권을 ‘가톨릭정권’으로 규정하고 기독언론을 통해 가톨릭정권 등장에 따른 한국기독교의 위기의식을 표출했다. 언론인이자 목회자였던 김인서 목사는 장면 정권을 적도(敵徒)로 표현했으며, 가톨릭정권이 이승만 정권 때 세운 형목과 군목 제도를 집권 첫날부터 뜯어고쳐 개신교 세력을 ‘쫓아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 민족개조 논리


5.16 당시 한국기독교는 허영ㆍ사치ㆍ향락과 같은 퇴폐한 것들을 일소해야 한다는 정신혁명을 주창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금주ㆍ금연 운동을 비롯해 커피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부세력이 내세운 인간개조론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은 ‘인간개조론’에 크게 공감해 5.16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함석헌은 국가재건회의 기관지인 <최고회의보>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실어 민족성의 개조를 주장했고, <기독교사상>은 한국기독교가 사회갱신운동을 통해 인간혁명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김재준 목사는 인간혁명은 기독교의 ‘영적 새창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는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재건 과정에서 자신들이 정신혁명의 선두에 서야한다고 자임했다.


3) 5.16에 대한 인식의 전환


○ 주일성수


한국기독교는 일요일에 시험을 치르거나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것을 반대해왔고, 월남 이전 북한에서는 이로 인한 탄압이 트라우마가 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5.16을 지지하면서 군부세력이 주일성수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군부세력이 겉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달리 일요일에 긴급통화개혁을 실시해 이날 구권(舊券)을 신고하지 못한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의사고시가 일요일에 강행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기독교는 군부세력에게 한국기독교 집단 정체성의 핵심인 주일성수가 크게 침해받았다고 여겨 이들을 규탄하고 나섰다.


○ 민정이양


군부세력이 당시 최고의 정치적 화두였던 민정이양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군정을 4년 연장하기로 하자 군사정부가 조속한 시일 내에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조건으로 지지를 표했던 한국기독교는 군부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공개서한을 통해 민정이양 약속을 번복한 것을 비판했고, 비록 내부반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을 준비하기도 했다. 1963년으로 넘어오면서 5.16에 대한 지지와 기대는 실망과 불신으로 바뀌었다. 이 갈등은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맞물려 한국기독교 안의 보수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전반적으로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나. 소감과 궁금증


국민학교 입학했던 해에 5.16이 일어났으니 당시 일을 기억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저 다음 해 여름 화폐개혁 했을 때 아이스케키 장수가 하나에 10환하던 아이스케키를 10원에 열 개 준다는 말을 듣고 신이 나서 아버지한테 10원만 달라고 했다가 야단맞았던 일(초여름이었는데 몹시 더웠고, 신권 10원은 구권 100환이었다), 그 다음 해에 있었던 대통령선거 때 밤새 개표방송을 들으시던 아버지 모습이 한 장면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한국기독교는 예전부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한 번도 같은 노선을 견지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지금껏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신앙적ㆍ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한 자료는 봤어도 사회적ㆍ정치적 관점에서 정리한 자료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한국기독교 흑역사>가 매우 새롭게 느껴졌고 그의 저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한국기독교는 5.16에 대해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고 모두 지지를 보냈다고 서술하는데, 양 진영이 한 번도 같은 노선을 견지한 일이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내게는 매우 뜻밖이었다. 더구나 진보의 대명사인 강원용ㆍ함석헌ㆍ김재준이 5.16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5.16에 대한 지지가 한국기독교의 일치된 의견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대세였지만 부분적으로 반대도 있었다는 정도인지, 반대가 있었다면 그게 누구였고 무엇 때문이었는지 궁금하다.


저자는 한국기독교는 조속한 민정이양이라는 조건부로 5.16을 지지하면서 그 이유로 장면 정권의 무질서와 5.16 주도세력의 독재라는 두 가지 악 중에서 차악을 선택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5.29 성명’과 강원용의 회고록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장면 정권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무질서한 정권’이라는 생각이 당시 한국기독교의 일치된 견해였는지 궁금하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장면 정권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부정적인 인식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무질서한 정권이라는 정치적 평가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부정적 인식의 바닥에 한국가톨릭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경쟁의식, 가톨릭정권 등장에 대한 위기의식, 더 나아가 상대를 적도(敵徒)로 여기는 적대감이 깔려있다고 서술한다. 지금도 기독교 일각에서는 가톨릭 신학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주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톨릭을 큰 범주에서 같은 기독교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나는 그마저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기독교와 가톨릭의 갈등에 대한 소식을 들어본지도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가톨릭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연구의 좋은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코로나로 인한 대면예배 제한이 한국기독교의 광범위한 저항에 맞닥뜨리면서 주일성수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나는 예배는 일요일에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비대면 예배도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꼭 일요일이어야만 한다는 데도 회의적이다. 물론 비대면 예배가 신앙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가 교회와 신앙생활에 본질적인 요소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 역시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여기는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래서 주일에 교회 가기 위해 돈을 내고 버스를 타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주일성수가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사회적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대면예배를 위해 대정부투쟁을 선언한 교회가 과연 옳게 보일 수가 있었겠나.


저자의 논문을 읽으며 교회가 견지하는 주일성수에 대한 강고한 자세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지금 5.16과 같은 상황을 맞게 된다면 주일성수에 대한 문제가 지지와 반대를 가르는데 어느 정도 비중으로 작용하게 될지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아마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적어도 그 당시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의 퇴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군부세력이 민정이양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비판적으로 돌아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거두지 않은 한국기독교 일각의 행태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다. 기대


저자는 <한국기독교 흑역사>와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에서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위치를 총론적으로 조망했고, 작년과 올해 연이어 이의 각론에 해당하는 <1950년대 한국 개신교 선거운동의 주도세력에 대한 연구>와 <5.16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과 대응>에서 50년대와 60년대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정치활동을 10년 단위로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70년대와 80년대에 대한 각론이 뒤이어 발표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인 저자가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 식민지시대의 문화사 연구의 결실인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을 발간하기도 했고, 이 논문 발표의 소감을 전하는 글에서 다음에는 한국기독교 역사가 아닌 지역사(地域史)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보아 당분간 기대하는 논문을 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ㆍ정치적 위치에 대한 연구물을 빠른 시간 안에 접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것이 다른 연구자들로 하여금 이에 좀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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