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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12. 2022

이상한 정상가족

가정폭력의 사회학

김희경

동아시아

초판 2017년 11월 21일

개정증보판 2022년 2월 2일


우리 세대가 대체로 그렇듯 나 역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말대답하는 건 물론이고 어머니도 말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고 자란대로 형제들이나 자식 모두 어떤 경우에도 아내에게 폭력을 쓰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산다. 그런 나도 자식에게 매를 드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간혹 자녀를 학대하는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저럴 수 있느냐고 탄식하면서도 그것과 내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게 같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저자는 체벌이 학대로 이어진다면서 체벌과 학대를 같은 단어로 취급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학대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게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체벌을 가하다 통제를 잃어 생기는 결과로 여긴다. 도구를 가지고 체벌을 가하는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할 가능성이 9배나 높으며, 체벌의 긍정적 효과는 믿음뿐이고 체벌의 부정적 효과는 연구결과가 워낙 많아서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학창시절 회초리로 맞았던 이들은 한결같이 그 덕에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발언을 인용한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이에 대한 체벌이 자기네 문화적 전통이며 문화적 특성이나 종교적 가르침이라고도 주장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체벌을 옹호하는 가장 끈질긴 논리라고 비판한다. 아이를 때리면 당장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몰라도 폭력은 폭력을, 세대 간의 단절을 불러오며, 체벌은 약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른을 때리는 것이 형사 처분의 대상이 된다면 아이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옳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아동인권단체의 캠페인도 이의를 달기 어렵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를 부모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로 바라본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서 30대 주부가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살수차에 대항해 자기 어린 자녀를 태운 유모차로 맞선 일이 있었다. 당시 “아이의 안전은 생각하지 않고 그런 곳에 갔다”고 비난하는 의견과 ‘나라와 아이를 위한 진정한 용기’라는 찬사가 팽팽히 맞섰다. 당시 나는 이것이 “안전을 생각하지 않았느냐, 안전마저 무릅썼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는 자기 소유로 여겼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저자의 주장에 백분 수긍하는 것이 옳다. 체벌과 학대의 경계를 선명하게 나눌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벌과 학대가 같다는 저자의 인식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이 옳다면 나뿐 아니라 내 앞에 살아온 수많은 이들의 경험이 모두 틀렸거나 한결같이 의도적인 오해를 고집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 때문이다. 연구결과가 그렇다고 해서 오랜 경험에서 나온 삶의 방식을 배척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무튼 저자는 독일은 기본법에서 자녀양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를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게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와는 달리 우리 민법에서는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아이에게 의도적인 해를 끼쳐도 된다는 예외를 인정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녀양육은 천륜이며 사생활의 영역이 아니라 인권보호를 위해 필요에 따라 국가가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문기자였던 저자는 ‘동반자살’이라는 용어에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다가 아동보호단체에서 일하면서 비로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저자에 따르면 ‘동반자살’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을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명백한 살인과 아동인권 침해가 온정의 대상이 되어버린다고 비판한다. 물론 저자가 주장한 대로 부모 아니라 세상없는 존재도 자녀를 죽일 권리가 없고, 부모가 도저히 살 수 없어 자살한다고 해서 남겨진 자녀가 반드시 생존 불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그래서 이런 사건을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했다고 보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이런 경우 아동살해(child homicide) 또는 자녀살해(filicide)로 구분해 다룬다고 했다.


나는 이런 저자의 주장에 이의가 없다. 하지만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식은 자기 인생이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인생까지 포함해서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그렇게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식의 삶을 지키는 일을 자기 목숨 지키는 일과 같게 여긴다. 그러니 자식의 삶을 지킬 수 없게 된 부모가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나.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도 못하겠다.


긴 노동시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임금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일로를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가정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가족이 위기에 처했다는 방증이므로 아이의 삶과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 개입이 필요”하며, 따라서 가정폭력을 막기 위해 유엔아동권리협약과 같은 기구에서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한 부모에 대한 공동체의 지원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인구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기업의 중장기 경영전략을 세우는데 필수불가결한 사회 지표였기 때문이다. 국내 거의 유일한 인구학자인 서울대 조영태 교수는 인구문제를 ‘정해진 미래’라고 정의한다. 수십 년 후에 사회를 지탱해나갈 이들이 이미 태어났으니 말이다. 합계출산율이 2.1이 되어야 현재 인구가 유지된다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2018년에 1.0 밑으로 떨어졌다. 국가소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에서도 이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양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지만 현재로는 백약이 무효로 보인다.


저자는 인구정책에 성공한 스웨덴에서는 자발적으로 자녀 갖기를 원하는 가정에 대해 사회가 출산과 양육을 돕고 아이의 미래를 함께 돌보는 것을 가족정책의 핵심으로 여긴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여성이 일과 양육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겪지 않도록 만들고, 부부가 모두 일할 수 있도록 사회가 양육 부담을 나눠가지고, 교육ㆍ의료ㆍ주택 문제를 사회가 해결한다. 출산휴가는 부모 중 한 쪽만 쓸 수 없고 전체 일수 가운데 최소 90일은 부모가 각각 써야 하는데,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가사분담이 자연스러워지고 고용주가 굳이 여성 채용을 꺼릴 이유가 없게 되었다. 출산은 이와 같이 사회안전망이 갖춰질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출산율을 높이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은 우리가 인구정책에 실패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가 아닐까 한다.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은 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은 혼외출산을 정상가족에 대한 도전이나 일탈로 간주하며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을 정상가족으로 간주한다면 출산율 제고 자체를 목표로 삼아 인구정책에 이미 실패한 우리 사회가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기회마저 날려버리는 셈이 되지 않을까. 소위 정상가족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이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차별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혼모나 혼외출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는 대대적인 혁신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우리 정부에서는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포기했을 때 그 아이를 대신 키우는 양육시설에 더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물론 미혼모가 양육을 포기하는 게 단지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늘릴 경우 적어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양육을 포기하는 미혼모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아직 많은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에는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양육 미혼모에 대한 차별의식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양육 미혼모에 대한 차별이 미혼모 자녀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니 말이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의 인구현상은 좀처럼 풀기 어려운 숙제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제목인 <이상한 정상가족>은 2016년 정부가 취약가정을 중점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조손ㆍ이혼ㆍ재혼ㆍ다문화ㆍ새터민ㆍ장애인 가정을 취약가정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을 빗댄 비판으로 보인다. 소위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을 학대가 일어나기 쉬운 취약가정으로 분류한 것인데, 정작 저자의 연구팀이 모니터링한 대상 중에 장애인ㆍ새터민ㆍ다문화ㆍ조손 가정에서는 아동학대가 일어난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2월 어느 날 과학 도서를 주로 출간하는 동아시아 출판사 한성봉 대표께서 페이스북에서 이벤트를 열었다. 응모하면 책을 증정한다고 해서 얼른 쫓아가 댓글을 남겼다. 이런 행운과는 거리가 먼 편이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뜻밖의 행운을 얻었고, 덕분에 좋은 책을 읽었고, 이렇게 소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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