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2.04.30 (토)

by 박인식

먹고 사는 일로만 치면 사우디도 그렇게 빠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 살면서 비로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감사할 줄도 모르고 받아 누리고만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사방이 뿌연 흙먼지로 뒤덮인 곳, 하다못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돈 없으면 누릴 수 없는 곳에 살고 나서야 한국 땅 도처에 깔려있는 숲길이며 개천길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운동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밖에는 더워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늘 실내에서 꼼지락대다가 안산자락길이며 홍제천길을 휘젓고 다니니 그저 꿈만 같다. 한국 떠날 때와는 달리 그동안 곳곳을 얼마나 잘 꾸며놨는지 걸으면서도 매번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걷다 보면 곳곳에 공연장이 보이는데, 근처 사는 조카들 이야기로는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공연을 한단다. 얼마 전에는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해서 난리도 아니었다고 해서 공연계획을 보면 알려달라고 부탁해 놨다.


지금이야 몇 년 전에 비하면 다른 나라라고 할 만큼 개방되었지만, 처음 사우디에 부임했을 때 영화관은커녕 공연장 하나 없었다. 미술관이 어디 있다고는 했는데 정말 볼 게 없더라는 말을 듣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끔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열리는 음악회가 사우디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그런 곳에 있다가 돌아왔으니 공연을 벌써 열댓 번은 봤어야 하는데, 실상은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영화관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였다.


아내는 외출하고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서 홍제천길을 걷다가 욕심을 내서 안산자락길로 접어들었다.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워 살펴보니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한쪽에서는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재즈공연이라고 했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얼른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낯선 이름이었고, 동네 산책길에서 열리는 공연이 뭐 그렇겠지 싶어서였다.


재즈 밴드 연주가 시작되는데, 이거 장난이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재즈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이미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살랑살랑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누리는 음악의 향연. 좋은 세월에 좋은 동네에 사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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