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2.05.06 (금)

by 박인식

평생 스승으로 여기는 목사님이 계신다. 목회하신 두 교회가 모두 맨땅에서 출발해 수천수만의 교인을 둔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임기 마지막 날 송별식조차 열지 못하게 하셨다. 두 번째 교회에서는 주일저녁예배에서 마지막 설교를 마치시고 내외분이 직접 차를 몰아 거창으로 떠나셨다. 작년 겨울 그곳을 찾았을 때 은퇴 이후 계획을 물어보시고는 그곳에서 함께 마을을 일구자고 권하셨다.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지만 뜻있는 일에 남은 시간을 쓰는 게 신앙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니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얹혀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목사님께서 권하신 대로 시골로 내려가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도울 만큼 아는 것도 없고 낯선 곳에서 뭔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쉽게 엄두 낼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생각이라면 역할이 없어 존재가 부정당했다는 불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게 내 모습이다.


주말에 쉴 수 있고 최저임금 정도 일자리면 좋겠다. 직원들이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단순 반복 작업을 나 같은 은퇴자에게 맡기면 회사로서도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텐데. 마지막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으니 OA에 능숙하고, 자료 찾고 분석하고 보고서 쓰는 일이 주업이었으니 국영문 가릴 것 없이 과제물 작성이 가능하고, 해외사업에 일익을 감당할 수도 있겠다. 필요하다면 임금을 그보다 낮출 수도 있고, 임금 줄 형편조차 되지 못한다면 그저 일할 공간만 마련해줘도 괜찮겠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어르신 취업지원센터 담당자는 그런 조건이라면 기회는 사방에 있을 거라 하더라만, 막상 찾아보니 그런 의사를 밝힐 기회조차 잡기 어려운 게 현실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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