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2.05.19 (목)

by 박인식

어제 북한산 다녀오느라 고단해서 쉽게 잠들 줄 알았다. 산길을 내려오는 게 무리였던지 무릎에 미세한 통증이 계속되어서 오히려 잠을 설쳤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으로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외국에 사는 친구 하나가 잠깐 출장 왔다며 함께 저녁이나 먹자는 전화를 받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십대 초반에 만난 친구를 칠십을 코앞에 둔 나이에도 만날 수 있다는 건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졸업하고 오십 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몇 번 만난 친구도 그렇고, 그 세월동안 한 번을 안 만났어도 만나자마자 마치 엊그제 본 것처럼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 아마 어렸을 때 친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친구가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남보다 조금 낫다는 이유로, 어쩌면 그럴만한 위인도 못 되면서 나대고 으스대고 남을 깔보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고, 내 친구 중에 그런 종자가 없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만나는 친구가 모두 반가운 건 아니다. 아직 젊었으면 마음공부 삼아 그렇게 눈꼴신 친구도 만나겠지만, 살날 며칠 남지 않은 이 나이에 뭐 한다고 그런데 시간을 낭비할까 싶어 반갑지 않은 친구는 아예 연락처마저 지워버린다.


사십 년 가까이 보잉사에서 일하던 친구는 작년에 은퇴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부속품처럼 일정에 묶여 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면서도 지금도 세계를 종횡으로 누빈다. 항공사에서 평생을 보낸 친구는 은퇴하고 나서도 같은 분야에 비상근으로 일하며 노후를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은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직 중에 있는 것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어도 이 나이 되니 만나서 소주잔 나누고 수다 떠는데 아무 상관이 없더라. 누가 그러더라. 나이 들면 잘 생기고 못 생긴 게 다르지 않고, 자리가 높고 낮은 게 다르지 않고, 재산이 있고 없는 게 다르지 않고, 나이가 훨씬 더 들면 살아있으나 죽었거나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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