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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02. 2022

전라디언의 굴레

호남수난사

조귀동

생각의힘

2021년 12월 24일


호남인에 대한 멸칭인 ‘전라디언’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붙인 책이 나왔다고 해서 한 편으로는 놀라웠고 한 편으로는 궁금했다. 지역의 극한 대립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것을 공식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일전을 불사할 각오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내부자라고 해도 말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만 공식적으로 아무도 건들지 않으려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보겠다는 저자의 의도적인 도발로 여겨졌다.


먼저 고백할 일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호남에 대해 편치 않은 기억을 안고 살았다.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사업에 끌어다 쓴 빚을 갚지 못해 수년간 빚쟁이에 시달렸다. 미아리고개 산동네까지 밀려났을 때 빚쟁이가 찾아와 몇 달 동안 단칸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지냈다. 얼마 후 보증금까지 까먹고도 월세를 내지 못해 삼월 그믐날 밤에 길거리로 쫓겨났다. 단칸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던 빚쟁이도, 캄캄한 밤중에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은 집주인도 모두 한 때는 아버지와 호형호제 하던 호남인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다고 이해했고, 이후 호남인들을 친구로 동료로 만났고, 지금까지 교분을 이어오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이웃들이 모두 호남인이었다. 어려운 가운데 어울려 살다보니 서로 힘을 합해야 했고, 사는 게 워낙 팍팍했으니 이해관계에서 양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호형호제 하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원수로 돌변하는 게 신뢰할 수 없거나 표리부동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곳에 하필이면 호남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저자는 생활이 어려웠던 많은 호남인들이 노동자로, 하층민으로 서울에 유입된 것을 호남 비하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시작된 호남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에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승만은 민주당 구파의 뿌리였던 한민당을 집요하게 견제하고, 그 결과 한민당의 주류를 이루던 호남 지주로 대표되는 호남 자본이 배제된다. 6.25 때 호남지역까지 내려왔던 북한군이 패퇴하면서 좌익세력과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이어간다. 이때 북한군과 좌익세력이 이승만을 옹호하는 우익세력을 살해하고, 이는 이후 국군과 경찰이 좌익세력을 학살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호남의 인적자본이 결딴났다고 말한다. 호남차별의 연장선에서 전후 한국 경제재건의 원동력이었던 원조 자금이나 융자는 서울과 영남에 집중된다. 이로 인해 영남에서 기업을 일으킨 삼성과 럭키(LG)는 한국 대표기업으로 성장하지만 호남은 또 다시 배제되고 같은 규모였던 호남의 대표기업은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호남이 산업화에서 소외되다 보니 상업자본이나 자산계급이 형성되지 못해 대기업이 나타나지 못한다. 번듯한 대기업이 없으니 대기업과 거래하거나 대기업의 일원으로 경험을 쌓을 수 없게 되고, 인적자본이 결딴난지라 경험을 쌓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가가치가 낮은 사업에 종사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기업이 성장하지 못한다.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고 영세한 규모에서 맴돌고 있으니 일자리가 부족하고, 구매력은 떨어지고, 서비스산업의 질과 양도 아울러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바로 서울이었다. 그래서 많은 호남인들이 노동자로, 하층민으로 서울에 유입된 것이다.


당시 호남의 철도 연결 상태가 이런 호남 푸대접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호남선이 단선을 벗어난 것은 경부선에 비해 한참 뒤졌다. 대전-익산 구간은 1978년에, 익산-광주 구간은 1988년에 작업이 끝났고, 마지막 구간인 광주-목포 구간은 200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복선화작업이 끝났다. 1980년대에 경부선은 하루 112편이 운행되었던데 비해 호남선은 그에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루 28편만 운행되었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호남 푸대접은 민주당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박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호남인의 정치적인 정체성이 민주당으로 고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서울과 수도권으로 유입되어 상대적으로 빈한한 삶을 살았던 호남인들의 정서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호남인들은 경기도 성남ㆍ광명ㆍ고양ㆍ시흥ㆍ과천 주민의 30~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기도 전체로는 3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지역이 민주당 세력권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민주당에 대한 호남의 지지율이 지금과 같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주당의 우위가 영남에서 공화당의 우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만난 정의당의 고위급 인사는 상황에 비해 민주당 우위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은 진보정당의 주축을 이루는 중요한 조직기반인 노동조합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호남이 영남에 비해 제조업이 뒤졌던 결과라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뒤진 게 아니라 없었다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한다.


아무튼 이런 격차는 5.18을 기점으로 폭발력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민주당의 절대 우위가 지금과 같게 된 것은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부터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원인으로 김대중이 펼친 대중경제론으로 대표되는 진보주의 정책을 꼽는다. 그런데 평범한 대중이 대중경제론을 이해하고 그것 때문에 김대중이 이끄는 민주당이 호남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해석은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1987년 대선 때 나는 전남 영광원전 건설현장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에 대한 신임은 광풍을 지나 신앙이라고 할 정도였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말투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감히 입을 벌릴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영남 출신이었던 동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과장 때였으니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는 경험한 상태였는데도 나는 그때까지 대중경제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호남의 평범한 대중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서울의 평균적인 사회인이 알지 못하는 경제론으로 어떤 지역의 평범한 대중이 특정인이 이끄는 특정 정당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다지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5.18 피해자인 호남인이 5.18 수괴로 몰려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김대중에 대한 동병상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전두환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동료였던 노태우에게 투사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어쩌면 전두환에 대한 적대감만으로도 김대중과 민주당에 대한 절대지지의 동력으로 충분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호남 차별, 호남 푸대접에 대해 호남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우리나라에서 결집력 강하기로 소문난 단체가 셋 있다. 해병전우회와 고대교우회, 그리고 호남향우회가 그것이다. 호남인들은 극심한 호남 차별에 대한 설움을 호남향우회를 통해 위로하고 위로 받았으며 그러면서 극복해나갔다. 저자는 그것이 김대중과 민주당을 향한 지지의 핵심이라고 판단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에게서 호남 색깔을 지우는 모습으로도 나타났다. 호남 사투리를 쓰지 않고 호적을 바꿨다.


호남 차별의 결과로 생긴 호남인들의 한은 1987년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다. 극심한 호남 차별을 겪으면서도 하층민의 삶을 벗어난 호남인들이 늘어나고 정권교체로 엘리트에 편입되는 호남인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후예로 인식되는 보수정당의 절대열세는 바뀌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호남인들이 엘리트층으로, 기득권층으로 편입되지만 저자는 그 혜택이 호남과는 무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그들은 수도권의 기득권층이 되어서 호남인으로서의 동질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곳곳에서 호남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극우적인 사이트는 제외하더라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면서 호남인을 배제하겠다고 공고를 내고 섬유유연제를 생산하는 굴지의 기업에서도 수장이 공공연히 호남인을 배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호남인은 인종과 종자가 다르다는 망발도 들린다.


저자는 이런 정치적ㆍ사회적 지형이 조만간 변화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호남이 발전하지 못한 것이 5.16과 5.18을 일으킨 군사정권을 등에 업은 영남세력의 독주와 그들이 자행한 호남 소외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민주당 정부가 상당기간 집권을 했음에도 상황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을 그 이유로 든다. 물론 민주당 정부의 책임 말고도 지역 엘리트가 부재하고 지방정부가 무능한 데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지방정부가 무능한 것은 민주당 절대 우위를 바탕으로 공천이 곧 당선인 그들로서 유능해야할 절실함이 없었기 때문이니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절반에 가까운 시간동안 민주당이 집권하면서도 호남지역의 경제와 산업의 악순환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며 자기의 선택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호남에 대한 편치 않은 기억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 기억이 만들어진 그곳에 사는 이웃이 왜 호남인 일색이었는지 궁금해 했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내 궁금증에 대해 답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의 하층민으로 유입되게 만든 호남 푸대접, 호남 차별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천성이 선하다 해도 하층민으로 빈한하게 살면서 너그러워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삶에 작은 이자라도 붙여 보탬이 되게 하겠다고 준 빚을 갚지 않는 친구에게, 자기네도 단칸방에 살면서 세를 줬는데 보증금을 다 까먹도록 월세를 내지 못하는 세입자에게 어떻게 너그럽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원망하는 우리가 미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저자는 내부자로서 많은 문제를 예리한 칼날로 후벼 파고 고발한다. 아울러 그 원인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중앙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던 ‘호남문제’를 ‘스스로의 필요와 언어로 구축된 담론’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고 성과를 이루어 <전라디언의 굴레>를 성공적으로 벗어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덕분에 이제는 희미해졌으나 아직도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호남에 대한 편치 않은 내 기억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들 탓도 내 탓도 아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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