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Jul 04. 2022

동성애는 죄인가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고찰

허호익

동연

2019년 5월 31일


지난 가을에 귀국한 후 교회를 옮겼다. 수십 년 출석하던 교회를 옮길 때야 어디 이유가 한두 가지였을까 마는, 교회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그 중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리야드에서는 한국과 거리가 있다 보니 차별금지법이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언젠가 이슈로 불거졌을 때 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 같아서 이에 대해 법적으로 차별금지법이 신앙의 자유를 속박하는지, 의학적으로 동성애가 전환치료가 가능한 질병인지, 성서적으로 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여겨 금하고 있는지 두어 달 살펴본 후 그 결과를 열두 편으로 정리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관점에서 검토한 결과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전문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서 틈나는 대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내 주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챙겨보고 있다.


그 글을 쓸 때쯤 예장통합 교단에서 대전신학대 허호익 은퇴교수가 이 책 <동성애는 죄인가>를 발간한 것을 문제 삼아 그의 출교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조직신학자가 동성애에 대한 책을 써서 출교를 당했으니 “성서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주장이 궁금했다.

짐작했던 대로 성서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살펴본 것은 맞는데 저자는 더 많은 부분을 동성애에 대한 동서양과 고금의 이해에 대해서, 그 이해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동성애가 왜 범죄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합법화 되었는지, 그리고 의학적으로 질병으로 분류되던 동성애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질병 목록에서 제외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동성애가 단지 성서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 동성애를 언급한 곳은 모두 일곱 곳이다. 백성들이 롯을 찾아온 천사들을 상관하겠다고 요구한 소돔 사건(창 19:1-11),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율법(레 18:22 및 20:13), 마을 불량배들이 레위 사람과 상관하겠다고 요구한 여부스 사건(삿 19:16-26), 바울이 열거한 우상숭배 결과로 일어나는 죄악 목록(롬 1:26-27), 바울이 열거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의 유형(고전 6:9), 바울이 열거한 금지해야 할 행동(딤전 1:10)이 그것이다.


이 중 소돔 사건과 여부스 사건의 경우 많은 신학자들이 동성애라기보다는 나그네에 대한 환대, 또는 약자보호법을 무시한 폭력적인 남자들의 사회적 지배욕이자 성폭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에서 소돔 사건을 언급한 곳은 모두 28곳으로 그 중 소돔의 죄악을 언급한 곳은 15곳이지만 세 곳을 제외하면 죄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그 세 곳에서도 ‘소돔이 멸망한 것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은 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 역시 소돔 사건과 기브아 사건을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한다. 결과만 보면 남성이 남성과 성관계를 하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소돔이 멸망당한 것이지만, 롯이 그들에게 타협안으로 자기 두 딸을 내놓은 것을 보면 그들은 ‘위력을 사용해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동성애’가 아닌 ‘성폭력’으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동성애’와 ‘성폭력’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동성애 금지는 핵심 메시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를 요구했지만 천사들 때문에 동성애를 범하지 못했고, 동성애가 소돔 멸망의 이유라면 그것은 동성애를 범한 죄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를 요구한 죄 때문일 텐데 그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동성애를 요구한 것조차도 성폭력으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고대 성읍들이 보편적으로 저지른 악행의 대명사로 여겨졌고 그런 죄악을 반복하는 성읍은 언제라도 멸망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사용한 것이며, 최종적으로 “신구약을 통틀어서 소돔 멸망의 원인이 동성애라는 언급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바울이 열거한 ‘우상숭배 결과로 일어나는 죄악 목록,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죄악 목록, 금지해야 할 행동 목록’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남색, 탐색,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행하는 부끄러운 일’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남색하는 자’ 또는 ‘탐색하는 자’로 번역된 ‘말라코이’는 여성화된 남성으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미소년’을 뜻한다. 바울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를 나란히 언급했는데 이는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남색과 탐색은 로마사회에 유행한 부자나 권력자에 의한 미소년에 대한 성적착취로 행해진 동성애가 분명하다. 스스로 독신의 삶을 선택했고 정욕에 불타는 것 자체마저 절제하려 했던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고린도라는 대도시의 성적 문란에 경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성적 문란은 악덕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말하자면 남색과 탐색은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쪽의 요구에 의한 성적착취라는 것이며 따라서 이 구절은 동성애가 아닌 성적착취를 금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성적착취로 행해진 동성애’를 금한 것을 왜 ‘성적착취(성폭력)’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오직 ‘동성애’에만 초점이 맞춰졌는지 의아하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성경은 동성애를 뜻하는 ‘남색’(고전 6:9 등)을 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남자가 남자와 교합’(레 20:13)하는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개신교 주류의 해석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읽으면서 그것이 개신교 주류 세력의 주장을 열거하고 그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저자의 방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요약한 한국 교회의 동성애 반대 논리는 다음과 같다.


“동성애나 성전환은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동성애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의 문제이고,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이 인권을 위한 최고의 헌신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개발된 무기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세계 의학계가 동성애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여러 쪽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그 중심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952년 이후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진단해 온 미국정신의학협회(APA)가 1973년에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정신장애 항목에서 삭제하고 ‘성적지향장애’로 규정하였으며 1980년에는 아예 정신질환 진단 목록에서 제외했다. 199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동성애를 성적지향의 한 양식으로 규정하고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용어도 동일성 지향(same sex orientation)으로 대체하였다.”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고 이의 전환치료를 주장한 단체들이 있었다. 하지만 APA가 1973년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하자 많은 탈동성애 단체들이 자신들의 저지른 오류를 인정하고 주장을 철회하였으며 그로 인해 고통당한 이들에게 사과했다. 저자는 그 중 대표적인 1976년 창립해 탈동성애 운동을 37년간 지속하던 엑소더스 인터내셔널(Exodus International)이 2013년 6월 30일부로 전환치료를 중단하고 해산하기로 결정했다며 그 내용을 설명한다.


“동성애 전환치료가 가능하다고 믿는 미국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미국과 캐나다에 260개 지부를 두고 그 밖의 17개국에 150여개 지부를 가지고 범세계적인 탈동성애 운동을 펼쳤다. 이 단체의 회장은 이 단체의 웹사이트를 통해 그동안 성적 정체성을 바꾸려 시도해온 것과 동성애자 부모에게 낙인을 찍는 ‘회복이론’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그동안 이웃인 사람과 성경 모두를 존중하지 않은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며 동성애를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 무지한 일이었고 지금까지 성소수자들에게 도움보다는 상처만 안겨준 것을 인정했다.”


그동안 세계의학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것은 알고 있었는데 탈동성애 운동을 벌이던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다고 소개한다.


“한국상담심리학회는 2019년 회원 한 사람이 전환치료를 한다는 이유로 영구 제명했다. 학회는 내담자의 성적지향과 정체성을 존중해야 하는 상담자로서 직업적 윤리적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태도와 행위는 상담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과 내담자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매우 반가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설명 끝에 저자가 언급한 일부 내용은 저자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유지했던 논조와 차이를 보여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저자는 “범죄형 동성애는 회개해야 하고, 질병 또는 장애형 동성애는 치료 받아야 하며, 비록 동성애가 자기 의지로 변화가 불가능한 성적지향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성적지향으로 인한 동성애는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이 부분이 보수 신학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타협안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이 책 때문에 교단에서 출교 판결을 받았다. 학계에서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반발하는 것이 책 내용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를 위축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동시에 그것이 위에서 인용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는 저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출교 판결에 대해 상고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학자가 역사적 신학적으로 동성애를 조명하는 책을 썼다고 출교하는 교단에 목사로 남아 있는 게 불명예이고, 개인의 잘못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면 어떻게든 끝까지 싸워 명예를 회복하겠지만, 이번 판결은 전혀 그런 성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현재 예장통합에 일고 있는 반동성애 광풍 때문에 상고해도 결과를 뒤집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다.


오래 전에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를 극렬히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쓴 칼럼을 읽었다.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저자가 상고를 포기한 데에는 이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교회는 무언가를 반대하고 불안을 조장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구현해 왔다. 타인을 죄인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을 의인으로 여겨온 것이다. 누군가를 부정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추구하는 신앙인 셈이다. 반공주의가 대표적이다. 반공주의가 많이 희석되니까 이제는 동성애를 이용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예장통합의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임보라 목사의 동성애 옹호와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결의한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단이라고 판단한 근거 중 ‘성경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나 ‘문화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원어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성경을 부정하거나 현저히 왜곡하는 것이 아니며, 임 목사의 해석은 이미 성서 신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시도되어 온 것으로서 성경해석의 다양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데 대해서는 성경의 일부다처제, 살인이나 생태파괴도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지동설과 진화론도 다르지 않은데 그를 이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예장통합이 동성애를 이단으로 규정하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장로교회, 미국연합감리교회, 호주연합교회가 이미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허용했으니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일체의 교류와 협력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요지부동이다. 저자로서도 몹시 답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저자뿐이겠는가. 당장은 변하지 않겠지만 미국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도 오래 전에 주장을 철회했다고 하니 한국 개신교도 하루 빨리 자세를 고쳐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되돌아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2018년 미국 전역의 청소년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십대의 성소수자 25%가 최근 1년 동안 자살을 한 번 이상 시도했다고 답했는데 이는 이성애자의 6%에 비해 네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2004년 통계청 사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 성소수자 77.4%가 자살을 생각하고 47.4%가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일반 청소년에 비해 거의 다섯 배가 높은 수준이다. 이는 성소수자 혐오와 관련된 것으로 청소년 성소수자를 향한 집단 괴롭힘이 자살을 부추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2014년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응답자는 41.5%에 달했지만 신고율은 5.1%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절대다수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고 신고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이래도 교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주장을 고집하겠는지 묻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라디언의 굴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