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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13. 2022

헌법을 쓰는 시간

견제와 균형

김진환

메디치

2017년 7월 15일


몇 년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위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이 헌법과 헌법 정신을 거론했다. 그때까지 내게는 헌법이란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일반상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외국에 사느라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시위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었고, 그러면서 헌법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문과 130조로 이루어진 헌법을 읽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데 그렇게 읽어서 과연 헌법의 얼개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안내서가 될 만한 책을 찾았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만한 책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게 뭔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헌법을 왜 만들었고,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비록 명시적인 의사표현은 없었지만 행간을 통해, 그리고 우리 정치 현실을 감안할 때 그 대답이 긍정적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며 비로소 내가 궁금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헌법을 읽을 준비를 마친 것으로 여겨진다.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의 기둥


저자는 헌법은 무엇보다 권력을 제한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의 기둥을 법치주의, 민주주의, 권력분립, 자유의 원칙, 표현의 자유, 헌법재판소 이렇게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법치주의’는 시민에게 적용되는 규범이 아니라 권력에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시민이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권력자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권력자가 자의나 폭력이 아닌 법으로 시민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니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규범인 것이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법치주의를 법을 어기면 그가 누구이던 간에 예외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규범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라 법가사상이고 법가사상은 궁극적으로 백성을 왕의 권력에 복종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설명한다. 나 역시 그동안 권력자들이 법치주의를 내세울 때 법으로 시민을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이에 따르면 권력자들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가 법이 허용한 정도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내 무지의 소치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동안 권력자들이 법치주의라는 뜻을 오용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는지 의도가 섞인 왜곡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는 권력을 만들어내는 원칙이다. 국가권력의 주인은 국민이고 그래서 국가권력은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되고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수단으로 대의제를 사용한다. 저자는 대의제가 충분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뼈아픈 현실을 지적한다. 대표들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면서 국민이 아닌 정치인들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민주주의가 해결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제도로 국민투표를 들 수 있는데 2017년 퇴임한 독일의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은 국민투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국민투표 지지자였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정치에는 안보ㆍ세금ㆍ통화정책과 같은 수많은 결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결정은 까다로운 토론과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하는데 국민투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는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러니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성숙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제도의 문제라면 고쳐서 쓰면 될 일이다. 하지만 대의제를 이끌어가는 대표들의 역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 키우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매사를 정파적 이익을 따라 결정하는 우리는 이래저래 헌법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권력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본질적인 위험성이 지속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두 아이가 맛있는 케이크를 불만 없이 나누려면 한 아이는 나누고 나머지 한 아이는 고르게 하면 된다.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공평한 분배 뿐 아니라 경제와 균형을 통한 권력 제한에 관한 성공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나누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상대가 어떻게 권한을 행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공평하게 나누려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 권한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편이 가지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자기 권력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입법부가 케이크를 나누고 행정부가 케이크를 고르도록 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가 다른 것도 좋은 권력분립 장치이고, 여소야대야말로 권력분립의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국민들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정치체제이다. 다수와 다른 생각, 다른 이익을 가진 소수는 다수의 결정에 지배된다. 민주적인 결정이라고 해도 그들의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헌법에서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민대표가 다수결을 통해 결정한다 해도 이들의 자유를 함부로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라는 말이다. 소수정당은 희생되기 쉬운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시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이들을 과격하고 위험한 정당으로 생각하고 급기야는 정당 해산을 요구하기도 한다. 설령 이들의 주장이 과격하고 위험하다고 해도 소수이기 때문에 그 주장이 실현되기 어렵다. 반면에 그들의 주장은 다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며, 새로운 시각으로 사태를 보고, 다수가 무시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수의 권력독점을 깨기도 한다. 저자는 따라서 소수정당 때문에 민주주의 숨결이 유지되고 그들이 존재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의 활력도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결국 소수정당을 보호하는 것이 권력분립 원칙을 지키는 길이고 궁극적으로 다수의 국민을 위한 길이라는 말이다.


사법부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입법부가 만든 법을 적용해 판단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입법부가 정치적 결정을 입법화하면 사법부는 그 법을 실현할 뿐이다. 판단을 집행하는 것도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이다. 행정부가 판단을 집행하지 않으면 판단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저자는 하지만 이와 같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법부가 다른 권력과 결합하면 어느 권력보다도 무서운 권력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입법부와 결합하면 그들의 편견이 그대로 법으로 만들어져 판단으로 이어지고, 행정부와 결합하면 그 통합된 권력은 무서운 독재 권력으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헌법이 사법부의 독립을 엄격하게 보장하는 것은 사법부가 존엄하거나 구성원이 최고의 엘리트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법부와 그 구성원이 국민들의 자유와 헌법의 원칙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통령제 정부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에 충실한 고전적이고 원칙적인 대통령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증폭시킨 변형된 대통령제이다. 헌법 개정이 거론될 때마다 권력구조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 권력구조가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이미 논쟁을 시작했지만 국민들은 아직 관심이 없다. 권력구조는 정치인들의 관심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나 권력구조는 국민의 자유와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민들이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일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놀랍게도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필요한 경우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본 조항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허용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건을 매우 엄격하게 규정하여 실질적으로 제한을 최소화하기 위한 규정이다. 필요할 경우 (과잉금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나 반드시 법률로서 규정하여야 하며, 그렇더라도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는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따라서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확성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과잉금지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수단이 적절해야 하며, 침해를 최소화해야 하고,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헌법은 기본적인 사항을 추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갈라지는 것은 정해져 있는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답이 구체적으로 정해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헌법은 확실히 위험한 법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이런 위험한 법의 해석을 선출된 권력이 아닌 헌법재판소에 맡긴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에 맡기는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가 그 권한을 맡길 경우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며, 대통령이나 국회가 내리는 결정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일관성을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헌법재판소가 최선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이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헌법 개정


이전의 군사정부는 물론 민간정부로 전환된 이후에도 대통령으로 인한 문제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럴 때마다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현 체제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며 개헌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어떻게 분산할 것인지, 현재와 같은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고는 하나 중임을 제한하고 있어 임기 후반부에 가면 식물정부가 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몇 년 전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정부에서 개헌안을 발의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 밖으로 사라져갔다. 정부 개헌안은 문제의 본질이라는 권력구조는 손대지 않은 것이어서 행정부에서 과연 개헌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본질적인 필요를 외면한 개헌 논의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집권당에서는 권력을 놓기 싫고 심지어 야당에서조차 미구에 가져올 권력에 손상이 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하지만 대통령을 노리는 개인이나 정당은 누구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보면 정치인들은 권력구조를 고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남이 가진 권력을 제한하고 자기 권력은 극대화하고 싶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헌법을 개정할 경우 그 대상은 권력구조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대통령제의 유래, 대통령제에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장치,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미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들에게는 영국이 발전시킨 의원내각제가 가장 안전한 제도였다. 전제군주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만들어낸 합리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의회가 미국 주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미국 주민들이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권한마저 부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의원내각제가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해결책으로 대통령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할 경우 의회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화 되는 것을 염려해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했다. 이로서 정부가 의회로부터 독립해 의회를 견제함으로써 의회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의회를 상하 양원으로 나누어 하원은 인구비례로 선출해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게 하고 상원은 각 주에 두 명씩 두어 소수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했다.”


“우리는 정부와 국회가 독립적이지만 서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정 견제가 가능한 것은 아니고 정도 이상 견제할 수 없도록 한계를 두고 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는 항목을 삭제하거나 금액을 삭감할 수는 있으나 예산을 새로 만들거나 증액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고위공무원을 임명하려면 국회에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회가 동의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인사로 바꾸어 정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국회가 가결한 법안을 거부해 의회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 법안의 내용을 바꿀 수 없으며, 거부된 법안이 의회에서 다시 가결된다면 이를 반드시 공포해야 한다.”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탄핵심판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이 실패하고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탄핵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탄핵결정으로 대통령을 임기 중에 퇴임시키는 것은 파괴적이며 자극적인 정치행위이며 이런 행위가 반복되어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은 대통령제를 선택한 경우에 지켜야 하는 원칙이며, 설령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이라 해도 대통령을 탄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영역에서 정부에게 법안 제출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 우리 국회는 입법의 주도권을 정부에 내어주었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령과 각 부 장관의 부령으로 수많은 행정입법이 제정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균형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권한인 입법권이 궤도를 이탈해 버렸다.”


“우리는 장기집권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대통령 중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집권 초기에는 지나치게 막강했던 대통령의 권력이 집권 말기에 들어가면 급속하게 해체된다. 중임 가능성이 없는 대통령은 국정에 대한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하고 추락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러 학습효과로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실질적으로 2-3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국정을 채 파악하지 못한 채 불도저처럼 자신의 정책을 추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처 그 정책이 실현되기도 전에 임기가 끝난다. 다음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대통령 중임을 허용한다면 이런 문제 중 상당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을 개정하는 데는 아직도 반대가 만만치 않다. 그러기에는 아직도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의 해결책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한 후 중임을 허용하거나 의원내각제를 생각할 수 있다.”


“의원내각제는 정당 내부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다른 정당과 협상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가능하다. 우리 정치 문화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 문화가 달라지지 않은 채 의원내각제로 개헌하는 것은 불행을 초래하는 선택이 될 수 있다. 결국 현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 권한 축소 이야기만 나오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가 거론되고, 그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결국 대통령 권한 축소 방안도 슬그머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따라서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자면 그 문제에만 집중해 논의해야 한다.”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다른 기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법원, 헌법재판소,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감사원, 공영방송사가 그런 기관이다. 지금까지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도 없이 나왔지만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그 기관을 장악하는 것으로부터 집권을 시작했다.”


견제와 균형


나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는 ‘권력구조’가 아니라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통령제가 문제라고 하지만 미국이 대통령제를 택했기 때문에 문제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그렇다고 내각책임제가 해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국가라고 해서 대통령제 국가보다 국정이 더 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는 어느 권력구조가 되었든 그 구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떤 권력구조를 택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견제와 균형을 통한 권력분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국회는 무엇보다 입법에 전문성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최근 국회에서 정파적 이해 때문에 헌법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 한 법안 안에서 서로 상충하는 조항이 있는 것도 걸러내지 못하는 법안을 만들고 그것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절망을 느낀다. 평범한 시민의 생각이 이럴진대.


저자는 ‘법은 결함투성이 기계’라고 말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법을 바르게 운영해도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하물며 제 밥그릇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만든 법으로 인한 폐해는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헌법을 헌법답게 만들기 위해 기능하는 원칙을 들여다보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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