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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아프리카 버스

전원주택 입주기

by 박인식

이시백

도서출판b

2022년 6월 28일


창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설 쓰는 게 그렇고 작곡이 그렇다. 창작이기는 시를 쓰는 것도 다르지 않지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니 수준을 떠나서 엄두를 내어볼 수는 있겠다. 오래 전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끼적여 놓은 것도 적지 않아 책 내는 걸 꿈꿔본 일이 있기는 하다. 얼마 전에 서점 진열대를 살펴보면서 그 꿈이 서점 진열대만 어지럽히는 일인 줄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나까지 나서서 자원을 낭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창작할 재능도 없고 감정을 글로 빚어낼 소양도 없으니 혹시 책을 쓴다면 산문집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산문집을 읽을 때는 다른 책을 읽을 때와 자세가 다르다. 여느 때는 그저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면 산문을 읽을 때는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나라면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때로는 감히 비평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페친이신 박일환 선생께서 ‘이시백 표 문장’이 가득하다며 산문집 <아프리카 버스>를 링크해 놓으셨다. 저자 서명이 든 책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얼른 신청했다. 서명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시백 표 문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가인 저자 이시백은 4반세기를 교사로 봉직하다 은퇴해 전원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필요할 때면 나타나 언제든 자기 몫 이상을 감당하는 사람인데도 뒤풀이에서는 매번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건 집에 가는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글을 읽고 나서 책을 읽었으면서도 읽는 내내 저자의 전원주택이 태백산 줄기 어디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집이 ‘전원’ 주택일리 없는데 나는 그 마을을 심심산골이라고 읽었고, 책 말미에 실린 ‘침묵은 금이다’에서 저자의 아드님이 호랑이를 봤다는 말에 철썩 같이 그렇게 믿었다. 그러고 나서 어딘가에서 저자가 사는 곳이 남양주 수동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디에도 깊은 산골이라고 써놓지도 않았고 내내 ‘전원’ 주택을 이야기 했으니 내 오독의 결과인 게 분명하다. 그래도 호랑이 이야기는 조금 심했다.


저자가 사는 삼각골은 ‘부잣집 잔치에 불리어 온 광대가 줄에서 떨어져 삯도 받지 못한 채 울며 넘었다는 그리 높지 않은 광대울 고개’ 너머에 있다. 워낙 저자는 방안에 누워 창으로 낚싯대를 늘이는 집을 꿈꾸고 있었고, 그 답이 요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장 연립주택이라도 팔아 가질 생각을 한다. 그런데 어디 요트가 그리 만만한가. 연립주택 열 채 값으로도 감당되지 않을 만큼 비싼 걸 알고는 저자는 ‘산을 등지고,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볕 바른 정남향에, 전망 좋은 언덕땅’으로 눈길을 돌린다. 결국은 묏자리 쓰면 딱 좋을 곳을 찾아내고, 목수를 구하고, 모자란 예산으로 얼기설기 꾸려 스무 해째 살아오고 있다.


저자는 집 지을 땅을 사면서 “땅을 갖는다는 것은 도시의 아파트를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고백한다. 우리 동네는 유독 집값이 오를 줄 모른다. 그래도 내 집이라고 갖고 있으니 깔고 앉은 땅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걸 내 땅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저자처럼 집 지을 땅을 눈으로 확인하고, 거기에 석회로 기초 놓을 곳을 표시하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위에 지어지는 집을 보는 느낌은 저자 말처럼 도시에 사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일’일 것이다.


집을 다 짓고 나서 저자는 꿈꾸었던 주경야독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그것은 상상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경은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지만 야독은 어려웠다. 아니, 불가했다. 온종일 밭에 엎드려 땀을 흘린 뒤에 저녁상을 받고 나면 낭랑한 소리로 책을 읽기는커녕 요란스레 코를 골며 잠들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주경야졸(晝耕夜卒)이다. 책 읽는 선비들의 농사는 마당 한쪽의 텃밭을 꽃밭 일구듯 지은 것이 자명하다. 그게 아니면 식솔들의 생계를 떠맡아 농사를 업으로 삼아 주경하는 이들이 밤늦도록 낭랑한 소리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원두막을 짓기로 한 저자는 기둥을 세우느라 애를 먹다가 기둥이 썩지 않도록 주춧돌을 놓고 소금을 넣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생략해버린다. 그러고는 “사람이건 집이건 때가 되면 썩는 게 올바른 일이며, 요즘은 사람이건 플라스틱이건 너무 오래 가서 문제”라면서 생략한 것을 심오한 결정으로 여기게 만든다. 억지인가 위트인가. 하지만 저자의 아내가 “변함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어서 겨울이 되어도 독야청청한 잣나무들을 아주 싫어한다”는 설명은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십 수 년을 하루같이 누런 황토 빛만 보이는 사우디에 살다 보니 계절 바뀌어도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 곳에 산다는 것이 지겹다 못해 끔찍한 일일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 보면 산문은 문장이 편안하기도 해야겠지만 위트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저자의 책이 수월하게 읽히는 것도 문장이 편해서만은 아니고 이처럼 곳곳에 숨겨놓은 위트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남양주 수동에 호랑이가 나타났다지 않은가. 어딘가에 실린 서평에서 저자의 문장을 성석제의 그것과 비교해놓은 것을 읽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살펴보니 저자가 등단이 조금 늦기는 했다. 그래도 장유유서의 나라에서 네 살이나 형님인 저자의 글을 ‘성석제 류’로 평가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저자는 “앞서 펴냈던 대책 없이 낭만적인 <시골은 즐겁다>라는 산문집에 대한 반성이며 그 책을 읽고 무작정 시골로 이사 온 분들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로 이 책을 냈다”고 했다. 그래서 읽어야 할 책이 하나 또 늘었다.


저자가 자신에게 몰입하는 것으로 더운 여름 나기를 권하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몰입이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나를 잊고 욕심에 붙들리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며, 그것은 잊음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벗어남으로 채우게 되는 경지이다.”


무엇인가에 몰입한다는 건 누구나 꿈꾸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어떻게 몰입을 통해 더운 여름을 멋지게 날 수 있을까? 지금부터 궁리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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