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는가
이혜성
북오븐
2022년 8월 19일
교회에서 있었던 ‘공공신학과 한국교회’라는 특강에서 이 책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해본 일은 없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교회를 떠날 사람이 생기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다는 기사도 적지 않게 읽었다. 이 책의 내용 중 강의에서 인용된 ‘교회를 떠나는 이유’ 대부분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독교 출판사에서 오래 일해 온 저자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이미 교회를 떠난, 혹은 떠날 생각으로 잠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여덟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엮었다. 인터뷰이로서 저자의 의도가 질문 내용에 녹아들어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인터뷰한 내용을 그대로 전할 뿐 거기에 대한 어떤 해석도 붙이지 않는다. 섣불리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 책을 찾아 읽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런 저자의 해석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선택은 지혜로웠다.
최근 적지 않은 교회와 교인들의 행태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 기독교는 이미 사회의 신뢰를 잃었다. 신뢰를 잃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집단을 떠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탓할 일도 아니며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다. 어쩌면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모습은 교회가 안고 있는 빙산 같은 문제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터뷰에 참여한 여덟 사람은 모두 모태 신앙인으로 그 중 다섯 사람이 목회자이거나 목회자의 가족이다. 물론 이 비율이 교회를 떠나는 이들의 구성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지 않은 목회자나 그 가족이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이런 현상이 비단 일부 교인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면에서 충격적이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하나같이 교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칭하는 목회자들을 보면서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 모습이 과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인지 회의한다. 끊임없이 죄책감을 심어주는 설교에 피로를 느끼며 그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세상에 나가 빛으로 살기보다는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에 묶어 두고 그것을 신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급기야 교회가 사회인으로서 교인의 삶에는 무관심하고 교인을 단지 도구로 인식해 더 많은 몫을 감당해주기만 요구한다며 비난한다. 사람에게 선악까지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꼈다면 그런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여러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교인들의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부흥’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의 ‘성장’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치는 건 교인뿐이 아니다. 인터뷰에 응한 목회자들 모두 과중한 업무 때문에 가장 집중해야 할 성경 연구와 설교 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충을 토로하며,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런 상황에서 목회자의 자기 성숙이나 성찰을 기대하는 건 애당초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막 사는 사람들이나 저지를 법한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 목회자가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 책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의 과반이 목회자라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목회자가 자기 성숙과 자기 성찰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성장우선주의’ 때문에 목회자의 자질과 소양이 떨어졌다면, 그런 목회자가 교인의 반론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론을 감당할 역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모습을 카리스마라는 허울로 가리려 든다. 목회자의 설교가 예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거기에 감정을 자극해 교인을 분위기에 몰입시키는 찬양이 거들고 나선다. 그러다 보니 교인이 예배 중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인터뷰에 응한 몇몇은 이와 같은 목회자 중심의 예배가 아닌 예전이 강조된 예배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공회에 출석하거나 성공회 예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출석하던 장로교회를 떠나 루터교회로 옮긴 데는 그런 영향도 적지 않았다.
오래 전에 교회는 시대를 앞서 갔다. 여성을 사회로 이끌어 낸 것도 교회였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사회 어느 곳보다 여성을 차별한다. 여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가 유지되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뿐 아니라 여성을 그저 출산의 도구쯤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여성에게는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는다. 여성 목회자에게는 보조적인 역할만 맡길 뿐이다. 여성 목회자가 외면 받는 상황에서 그런 보조적인 자리라도 얻기 위해서 목사 안수를 포기한다고 증언한 이도 있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성 목회자들이 목사 안수를 허용해달라고 청원하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교회를 떠난 한 가지 이유라면 다른 한 편으로는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회의가 자리 잡고 있다. 성경의 폭력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축자영감설이나 천지창조 기사를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은 답을 얻지 못해 교회를 떠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과연 예수가 신의 아들로 이 땅에 온 역사적 존재인지, 예수가 유일한 구원자인지 회의하며 예수가 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내비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수없이 그런 질문에 부딪쳤다. 다행히 그런 질문 때문에 신앙 자체가 흔들린 적은 없었고, 지금은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나름의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지금은 정리됐지만 언제 어떤 질문이 또 다시 불거질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교리로 통칭되는 성경 자체에 대한 회의는 신앙을 건강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한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질문을 가능하게 만드는 관용의 정신과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안내자가 필수적인데, 그런 일을 감당할 준비가 된 교회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로 여럿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진정한 이유인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이들이 한두 가지 이유로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쌓이고 어느 날 그것이 한계점을 넘기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난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정작 자기가 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의아한 게 하나 있다. 교회를 떠난 이유가 하나 같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찾을 수 없다. 교회에서 있었던 ‘공공신학과 한국교회’ 특강에서 최경환 선생은 한국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은 것은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과 교회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인데, 왜 그런 고민은 이들이 말한 교회를 떠난 이유에 들지 않았을까? 그들 역시 그런 점도 이유가 되었을 테지만 피부에 와 닿는 이유부터 열거하다 보니 놓친 것이 아닐까 애써 합리화 해보지만, 아쉬운 마음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다.
나는 자기 신앙으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폄훼하고 적대시하는 종교는 기독교 말고 본 일이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들의 무례함에 늘 몸 둘 바를 모르고 살았다.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무례함이 혐오를 넘어 이제는 차별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무슬림을, 난민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을 오히려 신실한 것으로 여긴다. 과연 그런 혐오와 차별이 여기에 그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전에는 교회가 사회를 선도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교인에게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대치가 있었다. 아내와 교제를 시작했을 때 아내는 교회 근처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인 나를 (내 실상과는 관계없이) 후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 모습이었다면,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도 기적이 아닌가. 진즉에 없어졌어야 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