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길
최경환
도서출판100
2019년 10월 14일
교회에서 ‘공공신학과 한국교회’라는 특강이 열렸다. 공공신학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강의는 최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공공신학이 한국교회에서 생겨난 독특한 신학인 것은 아니었다.
강의를 맡아 수고했던 저자는 한국교회가 대중의 신뢰를 잃은 것은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과 교회가 핵심가치로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강의 말미에 누군가 “사회에서 교회가 약자를 돕고 선을 베풀기를 기대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꼭 교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인 셈인데,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저자의 대답이 몹시 궁금했다. 늘 들어오던 논리였고, 그것이 나를 옥죄어온 족쇄였기 때문이다. 답은 기대 이상으로 명쾌했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자와 저자가 연구하고 있다는 공공신학에 관심이 생겼다. 저자가 쓴 책을 찾았고 꽤 긴 시간을 들여 읽기를 마쳤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공공신학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의 담론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아울러 소개한다.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읽어봤지만 내게 그 내용을 따라갈 능력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다. 그래서 저자가 소개하고 인용한 부분은 건너뛰고 이를 바탕으로 이끌어낸 저자의 주장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교회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여기는 기준은 저자가 말한 대로 “도적질 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힘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저자는 그 모습을 “자신을 갈등에서 보호하기 위해 거기까지를 한계로 설정함으로서 공공성을 임의로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다행히 그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생겨나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시민사회에서 복음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나 연구가 많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가 공공신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교회는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교인이 줄어들고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위상이 위축되었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사회가 좌경화되면서 소수자들의 인권문제가 부각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이 기승을 부리고, 이슬람과 종북세력이 득세하고, 그것이 교회의 위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것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구체적으로 지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어 갔다. 그 결과 교회는 공정 가치와 공적 영역에서 점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의 수준과 의식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되풀이했으며, 급기야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로 전락했고, 이와 같이 교회의 박탈감이 깊어지면서 발언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저자는 이런 모습이 비단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는 두 가지 생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하나는 성경과 기독교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사회 문화와 정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교회 안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기독교적 가치와 도덕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힌다.
“이 사회를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윤리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라고 나는 확신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과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는 것, 바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현실화하는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직접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신실하게 살아내고 증언하는 것으로 사회를 섬긴다. 분열된 사회에 새로운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전략이나 계획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한 이야기를 살아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진정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사회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회로부터 물러나라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교회가 사회를 섬기되 그 자신의 방식으로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아닌 신뢰가 삶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저자가 진단한 것처럼 교회가 대중의 신뢰를 잃은 것이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과 교회가 핵심가치로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은 핵심가치가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성호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흑역사>에서 한국교회가 타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1910년 전후로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920년대에 이르러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조직에는 대체로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하는데 하나는 조직의 자기 존속을 위한 ‘유지 메커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유지 메커니즘’이 강해질수록 ‘성취 메커니즘’은 후퇴해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수단이 목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유지 메커니즘’이 과잉되면서 제도화된 교회를 지키고 성장 확장하는데 온 힘을 다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지배체제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교회 부흥이라는 유지 메커니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할 성취 메커니즘’을 앞서다 못해 괴멸시켜버렸다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약자를 돕고 선을 베푸는 것이 꼭 교회여야만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핵심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에서 교회 부흥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평생 교인으로 살면서 남 못지않게 교회에 헌신했다고 생각했다. 십 수 년 한국교회를 떠나 있으면서 자신이 헌신했던 일을 돌아보니 그것은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것이었다. 강성호의 정의를 빌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할 성취 메커니즘’을 잊고 ‘교회 부흥이라는 유지 메커니즘’에 매몰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귀국하면서 모교회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잘못을 깨달았으니 바로잡아야 하는데 모교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남은 시간을 그 일에 진을 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기독교 고유의 전통과 신앙의 언어를 상실하면서까지 세상과 소통하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사회의 언어로 번역된 복음이나 세속적인 언어로 전환된 증언을 굳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묻는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리라.
저자가 꼬집은 대로 나는 교인으로 살면서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약자를 돕고 선을 베푸는 것이 꼭 교회여야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 궁금했다. 저자는 그에 대해 가부를 말하지 않고 단지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했다. 생각해보니 교회의 본질을 그보다 더 선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다양성과 평등은 교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상충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참으로 옳다. 저자는 그런데도 교회는 이런 가치를 증진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하는 집단이 되었다며 질타한다(고 읽었다). 모교회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턱이었다. 그러던 중에 교회가 차별금지법 반대를 선언했고, 그것으로 그 문턱을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를 교우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저자가 공들여 소개한 공공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아쉽고 민망하다. 겨우 이해한 것을 정리하자면;
“세계적으로 공공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공공신학을 정의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니 평신도인 내가 이해 못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공공신학은 시대가 요청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학문이다. 공공신학은 공적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사회적 조건 속에서 교회가 공적 삶에 어떻게 관여하고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무엇보다 교회가 다원화와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공적 삶을 형성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공공신학은 시민들이 공적 토론이라는 방식을 통해 공론을 만드는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기구들을 향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공동선과 인간의 번영을 증진하려 한다. 이는 서구 민주주의가 이상형으로 상정한 합리적 의사소통을 전제하고 있다. 공공신학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가치와 이념을 증진하고 도모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추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공조하고 의제를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