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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2.09.24 (토)

by 박인식

베르겐에 대한 느낌은 실망이었고 그렇게 실망하게 된 이유는 이미 유럽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베르겐을 찾았을 때만 해도 유럽 풍경이 신기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처음 본 피오르드에 다시 마음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아무튼 베르겐 여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일정 마지막 날, 전날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투명할 정도로 푸른 하늘이 한쪽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항공편은 밤늦게 떠나니 아무튼 하루를 온전히 보내야 할 상황이었고, 큰 기대 없이 숙소를 나섰다. 항구 끝에 있는 공원을 찾았다.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투명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숲길을 지나 바다에 이르렀다. 그러고 전날 실망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알량한 기억력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베르겐을 베르겐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던 모습 중 하나가 항구가 끝난 언덕에 놓여있던 벤치였다.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해 베르겐에 도착하자마자 그곳부터 찾았지만 기억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실은 그곳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숲길 끝난 곳에 홀연히 나타난 풍경, 그곳이 베르겐을 베르겐으로 기억하게 만든 곳이었더라는 말이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등산전차를 타고 플뢰옌 산에 올랐다.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베르겐 항구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아, 베르겐에 실망했던 건 알량한 기억만이 아니었구나.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우중충했던 날씨, 그것도 한 몫을 했구나. 그런데도 애꿎게 베르겐 탓만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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