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한 세대 전의 일본 관찰기

by 박인식

도널드 리치

박경환 윤영수 옮김

글항아리

2022년 8월 8일


신뢰할만한 분의 추천으로 작년에 <일본의 굴레>를 읽었다. 저자 태가트 머피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일본을 방문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일본을 찾아 사십 여년 머무르며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로 일했다. 그 책을 번역한 박경환 선생과 윤영수 선생이 다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을 번역했다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두 분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일본에 살면서 일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았고, 그러다 <일본의 굴레>를 만났고, 혼자 보기 아까워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으로 번역을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일본 미학>의 저자인 도널드 리치는 태가트 머피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본에 건너가 66년을 체류했다고 하니 태가트 머피보다 한 세대 앞선 일본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두 책을 비교해 보니 겹치는 내용이 거의 없다. 그것이 관심사가 달라서라기보다는 경험한 세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저자가 50여년에 걸쳐 쓴 에세이 스무 편을 골라 엮은 것으로 각 글마다 발표한 연도를 표시해 놓았다. 처음 글이 1962년에 발표한 것이고 마지막 글이 2007년에 발표한 것이니 무려 45년이나 차이가 난다.


나는 사우디에서 십 수 년을 일했다. 교민이 많지도 않고 참고할 만한 기록도 없어 문제가 생겼을 때 좌충우돌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그렇게 깨져가며 경험한 내용을 하나씩 정리해 온라인에 올렸다. 간혹 그것을 책으로 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그럴 계획은 없다. 내가 만난 사람이나 경험한 것이 극히 일부에 한정된 것인데 마치 사우디가 다 그런 것처럼 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에 사우디 사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바뀌고 있으니 내가 경험한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고.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늦게 쓴 글도 이미 15년이 지났다. 듣기로는 일본이 우리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가까이는 15년 멀리는 60년 전에 관찰한 내용이 지금까지 유효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물론 역자들이 이 책을 번역하기로 선택했을 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청할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의아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읽는 동안 저자가 관찰한 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그 관찰이 지금도 유효한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저자는 차츰 줄어들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여성 차별이 심하며 상당수의 여성이 억압으로 여겨질 만한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르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본 여성은 열등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위로 태어나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부인하고 제한된 사회적 역할에 만족할 것을 요구받는다. 여성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한 인간으로 성취를 이룬 여성은 ‘여성스럽지 않다’(온나라시쿠나이)고 표현한다. 그러나 여성이 커리어를 쌓는데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자보다 적은 급여를 받는다. 선진국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일본만큼 여성을 노골적으로 물품으로 여기는 나라는 없다. 놀라운 것은 일본 여성은 그런 억압의 정당성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일하는 여성이 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추가적인 차별도 줄었다. 일본 여성은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다.” (2005년)


영화평론가인 저자는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는 달리 문학과 희곡은 여성 작가가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전문가로서 누구보다 이에 대한 이해가 깊을 것이니 그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일본영화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여성에 대한 작품이 놀랄 만큼 많이 축적되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요 제작비를 대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여성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을 소비하는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영화’가 한 장르를 이루고, 그런 경향은 TV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직장에서 단결을 깨지 않기 위해 먼저 일이 끝난 직원들도 모두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같이 퇴근한다고 말한다. 기다림에 대해서도 좀처럼 접해보지 못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일본인은 사회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평균에 해당되는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평균을 평범함으로 동시에 정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단결(소속감)을 깨지 않기 위해 직원들이 동시에 퇴근한다. 퇴근한 후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술집으로 향한다. 아시아 대도시에서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만나기로 약속했다면 기다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늦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아쉬운 경우일 때 그렇다. 제 시간 지키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아시아에서는 시간에 도덕적 관념이 들어가 있지 않고 무기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시간을 잘 지키는 게 선이라거나 지키지 않는 걸 악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아시아에서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을 의식하면 안 된다.” (1984년)


최근 일본 남성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챙겨본 일이 없어 저자가 언급한 이런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이 글을 발표한 때와 지금의 차이인지 한일 간의 차이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아시아는 어디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일본이라고 하면 나는 무엇보다 먼저 ‘정원’이 떠오른다.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으로 가다듬어진 ‘정원’에서는 좀처럼 자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인들은 가다듬지 않은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래된 료칸에서 목욕하러 갈 때는 서로 마주쳐도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다듬지 않는 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나서야 그때부터 아는 체를 한단다. 그런 그들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손을 대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살린 우리 정원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 않겠나. 우리 궁궐은 주변 지형과 잘 어울리도록 지어서 용마루가 스카이라인을 넘어서지 않지만 그들의 궁궐은 우뚝 솟게 지어서 어디서나 눈에 띄도록 만든 것도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는 일본은 형식의 나라라고 말한다. 이것 또한 가다듬어진 것이라야 정상적인 것이라는 정서와 맥이 통하는 예가 아닌가 싶다. 전화 거는 법, 차 마시는 법, 꽃꽂이 하는 법, 돈 빌리는 법, 하다못해 옷 입는 법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 방법은 한 가지만 전해져 내려오며, 변이나 파격은 잘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래된 물건을 지금까지 사용하는 예가 수두룩해서 중고품은 많지만 골동품은 없단다. 골동품이 될 만한 것들이 모두 지금까지 제대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기모노는 몸통을 꼭 죄고 있어서 움직임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걷고 서고 앉고 무릎 꿇는 것 외 다른 행동은 불가능하며, 연미복과 기모노를 정장으로 여기고 모자와 장갑과 지팡이를 함께 사용할 만큼 복식에도 엄격하다.


오래 전에 동경에 출장 갔을 때 호텔 로비에 노부부들이 연미복과 기모노로 성장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을 봤다. 정년퇴직한 우체국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예식에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집마다 연미복을 두었을 리는 없고 모두 빌려 입고 나왔을 텐데, 그런 모습이 내게는 매우 생경하게 비쳤다. 저자는 일본인들은 그런 모습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복장을 집에 마련해 두었을 수도 있겠다.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이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뒤져있던 때가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문화가 앞섰다는 것은 문화를 이루는 토양이 갖춰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경제적인 여유와도 직결되는 것이니 과거에는 일본이 우리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져 있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언제부터 우리를 앞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다.


일본은 경제력에 비해 매우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안다. 검소함이 몸에 배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구매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구매력이 낮은 것이야 경제적으로 설명이 되지만 검소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뜻밖의 이유를 제시한다. 뜻밖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본은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가난한 나라였다. 천연자원도 별로 없고 일찍부터 인구가 넘쳐났다. 부유한 소수도 존재했지만 대다수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필요에 기반한 문화가 생겨났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검소함은 6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변모하는데도 일본인들은 검소함을 잃지 않았으나 일본이라는 국가는 조금씩 오만해지기 시작했다며 그 근거로 주택 구성이 변화한 것을 예로 든다.


저자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만 해도 서양식 방 하나에 나머지는 다다미방이었던 것이 다다미방 하나에 서양식 방으로 바뀌더니 이후에는 모든 방을 서양식으로 지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인에게 세를 잘 주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을 저자는 일본인들이 더 이상 백인 미국인을 우러러 보지 않는다는 반증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일본이 더 이상 다루기 쉬운 순종적인 나라에서 오만한 나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사는 형편이 나아지면 자세가 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못 사는 사람 눈에는 그것이 오만하게 비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니 살기가 나아지면서 오만해지기도 했겠다. 그러니 저자가 일본이 오만해졌다고 본 것이 타당하기는 하겠는데, 그런 현상을 백인 미국인에게 세를 주지 않는 모습과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일본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마음)를 잘 분간해야 한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일본인 특유의 의사표현 방법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저자는 일본에 도착해 해방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소도시를 벗어나고자 했고, 고향을 떠나옴으로서 더 이상 고향 관습에 억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해방감을 느낀 또 하나의 이유가 일본 관습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저자가 승전국인 미국의 국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사회적 특성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은 외국인이 일본 관습을 무시해도 용인할 만큼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고, 일본은 온갖 규칙으로 가득 찼지만 우치(내)와 소토(외) 경계가 분명해 외국인을 예외로 취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훗날 외국인이 한 곳에 모여 살기를 권고하지만 실제로 그 권고는 외국인의 행동반경을 얽어매는 제약이 되었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일본인이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저자의 판단은 수긍할 만하다. 외국인이니까 봐주기는 하는데 대신 우리 삶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이니 말이다.


저자는 승전국인 미국 국민으로 살았으니 일본 관습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들과 동화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한국인(조선인)이 정당한 대우를 못 받는 게 그들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앞서 언급한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 내용 중에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았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적지 않았다. 대체로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이 책을 읽었는데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은 기대와는 달리 공감 가는 부분보다는 저자의 독특한 견해나 관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조금은 당황스럽다. 무엇보다 글을 쓴 시점이 너무 오래되어서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는 자료로서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일본 사회와 일본인의 사고방식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참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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