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사 아카이브
황정수
푸른역사
2022년 2월 28일
내게 있어서 서울은 문안이라고 부르던 사대문 안과 그 주변이었다. 명륜동에서 태어나 공덕동과 돈암동 그리고 홍은동에서 평생 살았으니 말이다. 은퇴하고 지금은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촌이니 서촌이니 부르더라만, 내가 자랄 때는 그런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비록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말이다. 타지에서 상경한 이주민의 자식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올 초에 최종현 선생의 <오래된 서울>을 읽으며 비로소 북촌과 서촌의 역사며 그곳에 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남아있는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한 번은 그 책을 들고 북촌이며 서촌을 샅샅이 누벼보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서촌에 있는 경복궁역에서 내려 북촌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다니는 것이 일과이니 말이다. 그러던 중에 북촌과 서촌의 화가들을 다룬 이 책을 만났다.
저자인 황정수 미술사가는 북촌과 서촌이 화가들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무엇보다 광통교(광교) 부근에 작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 살던 재력 있는 명문 집안의 후예나 경제적 여유가 많은 중인들이 작품을 구매하거나 화가들을 후원하였고, 아울러 그곳에 중학교가 많아 교사로 일하기도 쉬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작품을 전시할만한 곳이 백화점이나 신문사였는데, 그곳 역시 종로나 명동에 있어 드나들기 쉬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단지 북촌이나 서촌 또는 그 주변이 예술의 중심지이기만 했던 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문화라는 것은 고르게 향유되는 게 아니라 문화의 토양이 형성된 곳에서 꽃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문화가 서울 전 지역에 걸쳐 골고루 발달하는 게 아니라 이와 같이 어떤 특정한 지역, 즉 ‘문화의 토양이 형성된 곳’에서 꽃피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화의 토양은 자원이 집중된 곳에서 발달하게 마련 아닌가. 당시 북촌과 서촌이 상징하는 문안(사대문 안)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4.19와 5.16을 거치면서 서울이 비약적으로 넓어졌는데도 나는 지금도 ‘문안’을 서울로 여긴다.
저자는 서촌의 화가를 장승업의 제자였던 심전 안중식(1861~1919)에서 시작해 북종화의 좌장 이당 김은호(1892~1979)와 남종화의 좌장 청전 이상범(1897~1972)을 거쳐 북한의 서예 각경체를 만든 봄뫼 이각경(1914~?) 남한의 서예 갈물체를 만든 갈물 이철경(1914~1989) 쌍둥이 자매에 이르는 서화가들을 살았던 곳을 중심으로 경복궁 주변, 수성동과 옥인동 부근, 필운동과 사직동 부근 이렇게 세 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고 전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다. 널리 알려졌다고 그들의 작품세계나 활동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이름을 들어봤다는 정도일 뿐. 그러니 이 책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대부분 내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미술계는 서울대 출신과 홍익대 출신으로 양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채색화 중심의 북종화(北宗畵)’ 좌장인 이당 김은호가 설립한 ‘낙청헌’ 출신이 서울대에 들어갔고 ‘수묵산수화 중심의 남종화(南宗畵)’ 좌장인 청전 이상범이 설립한 청전화숙 출신이 홍익대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서울대 미대가 치밀하고 감각적인 회화가 강했고 홍익대 미대는 산수화 같은 남종화 계열이 강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그림은 수묵산수화가 주류를 이루는 줄 알았던 무지를 깨닫고, 아울러 채색화 중심의 북종화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덤으로 서울대와 홍익대의 뿌리도 확인했고.
저자는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최고의 미술학교 출신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공립중등학교의 미술교육을 맡겼고 그것이 서구적인 미술교육의 출발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당시 제2고보(경복고등학교)에 부임한 야마다 신이치와 그를 이어받아 부임한 동기생 사토 구니오가 많은 한국인 화가를 길러냈다는 것이다. 야마다 신이치는 조선미술협회 설립에 간여했고, 경성 화단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에도 참여했다. 정현웅, 심형구가 그의 제자이다. 사토 구니오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거푸 특선에 들지만 그보다는 미술교사로서 많은 화가들을 길러냈다. 저자는 그가 단순히 미술교사 역할만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쳐 삶을 변화시킨 특별한 존재였다고 서술한다. 유영국과 장욱진을 비롯한 많은 화가를 길러내었을 뿐 아니라 제2고보가 미술로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북촌과 서촌에서 활동한 많은 화가들의 활동무대였던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부였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조선미술전람회 또는 그에 상응하는 활동에 참여해야 대접을 받았던 화가들이 친일파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 화가들을 미술사에서 배제해야 하느냐 아니면 화가의 행적과 작품을 별개로 여길 것이냐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저자는 강연에서 우리의 근대 미술사에서 제2고보 출신 화가들이 이곳 출신이 아닌 다른 화가들을 다 합쳐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이와 같이 제2고보 출신의 많은 화가들을 일본인 교사들이 키워내고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판단해 배제한다면 우리 근대 미술사의 상당부분이 지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월북 화가들도 다르지 않다.
물론 적극적으로 친일에 가담한 화가도 있을 것이고 자진해서 월북한 화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화가도 있었을 것이고. 저자는 강연에서 억울하게 친일파로 분류된 화가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것까지는 별 이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저자는 그러면서 설령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더라도 작품은 별개로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사를 에둘러 표현했는데, 이 부분은 이견이 상당히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행위와 작품을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일 또는 월북 예술인에 가해지는 사회적 시선은 무시하기 어려운 상수이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문학이나 음악 분야의 예술인들의 작품이 이미 배척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그와 형평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도 없어 보인다.
저자가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와 <불이선란>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세한도>에는 추사의 그림과 발문 외에도 청나라 문인 16명의 제찬이 붙어 있는데 어디까지를 <세한도>로 여겨야 할 것이며, <불이선란>에 소장했던 사람들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저자에 설명으로 <세한도>는 추사의 그림과 발문만 해당되는 것으로 쉽게 정리되었다. 저자는 <불이선란>에 찍힌 인장은 작품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장의 작품성이 높아야 하고 그것이 적절한 자리에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작품에 찍힌 인장이 그랬고.
오늘 리뷰를 쓰면서 저자가 그동안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던 많은 사진을 살펴보다가 <불이선란>에 찍힌 인장을 해석한 글과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그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저자가 인장의 정체를 그곳에 밝혀놓은 것이었다. 참고삼아 아래에 그 부분을 옮긴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책과 같은 시도는 일찍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우리의 근대 미술사로 봐도 무방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근대 미술의 아카이브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겠다. 저자가 이 책에서 미술사적인 내용 뿐 아니라 작품도 다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 내용으로 강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벌써 들었다. 책을 읽지 않고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어제서야 비로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저자는 강연에 앞서 평소 페이스북에 올리는 내용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평소에 저자가 올리는 글을 빼놓지 않고 읽었던 내게는 강연 내용이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평소 발표하는 글과 생각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고, 이 책에서 병렬식으로 서술해 놓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 강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했던 두 시간을 훌쩍 넘겨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연으로 저자가 발표한 글과 이 책이 하나의 유기체로 정리되었다.
이처럼 저자의 페이스북에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올라가 있다. 그동안 저자의 글을 열심히 읽었지만 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이미 상당히 많은 자료를 올려놓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중 일부가 책에 실리고 강연에서도 공개되었다. 하지만 내 느낌으로는 페이스북에 올라와 있는 자료가 그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었다면 꼭 그 자료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저자의 페이스북이 공개되어 있으니 이곳이 링크를 걸어도 실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3372487742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표작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세한도(歲寒圖)’ 못지않게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시동 달준(達俊)에게 난초 그림을 그려주려다 제자 오규일(吳圭一)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배경 이야기는 전설처럼 흥미롭다. 이러한 사연을 5개의 화제로 나누어 그림 여백에 빼곡히 쓴 모습은 그림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이 화제 속에는 김정희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사상을 담고 있어, 그의 미술세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준거로 쓰인다.
‘불이선란’은 화제뿐만 아니라 인장이 많이 찍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15개나 되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중 일부는 김정희 본인의 인장이고, 나머지는 작품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찍힌 소장자의 인장이다. 각 인장들은 글자를 새긴 솜씨가 매우 뛰어나 비범한 사람들의 인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 인장 중 대부분은 누구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만, 일부는 누구 것인지 확인이 되지 않고 학자마다 달리 주장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동안 어떤 책이나 논문에서도 이 인장들의 주인을 완전히 규명한 곳은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명확한 증거 없이 인장의 정체를 추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근래에 필자에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수집되어 모든 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 결과가 널리 알려지지 못해, 새로 발간되는 논문과 연구서에 여전히 잘못된 서술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언론의 교육적 기능을 빌어 그동안 완벽히 확인된 정보를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자 한다.
‘불이선란’ 속 15개의 인장은 김정희, 김석준, 장택상, 손재형 등 모두 네 명의 것이다. 이 중 김정희의 것은 묵장(墨莊), 낙교천하사(樂交天下士), 김정희인(金正喜印), 추사(秋史), 고연재(古硯齋) 등 5개이며, 김석준의 것이 석준사인(奭準私印), 소당(少棠) 2개, 장택상의 것이 신품(神品), 연경재(硏經齋), 소도원선관주인인(小桃源僊館主人印), 물락속안(勿落俗眼), 다항서옥서화금석진상(茶航書屋書畵金石珍賞), 불이선실(不二禪室) 6개, 손재형의 것이 봉래제일선관(蓬萊第一僊館), 소전감장서화(素筌鑑藏書畵) 2개이다.
그동안 연구자들 대부분이 김정희, 김석준, 손재형의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으나 나머지 6개 인장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해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물락속안’과 ‘소도원선관주인인’ 두 인장을 손재형과 김재수의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런데 새로이 발굴된 장택상의 인장 자료에 이 두 개의 인장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것임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회화 연구에서 인장은 서화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다. 더 이상 혼란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분명히 기록해 둔다.
종로구는 면적이 서울시 산하 구 중에서 중간 정도 되지만 자하문 밖 구기동, 평창동 등의 북한산 기슭을 제외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다. 그런데 그곳에 상당히 많은 동이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동 이름 중에 생소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 넓이가 한 블록 정도 되는 곳이 적지 않다. 인구가 많을수록 좁은 걸 보면 인구를 기준으로 동을 나눈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삼아 적는다.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사직동, 체부동, 필운동, 내자동, 통의동, 적선동, 도렴동, 당주동, 내수동, 삼청동, 팔판동, 안국동, 소격동, 화동, 사간동, 송현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구기동, 무악동, 교남동, 교북동, 평동, 송월동, 홍파동, 행촌동, 가회동, 재동, 계동, 원서동, 청진동, 서린동, 수송동, 중학동, 공평동, 관훈동, 견지동, 와룡동, 권농동, 운니동, 익선동, 경운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훈정동, 묘동, 봉익동, 돈의동, 장사동, 관수동, 인의동, 예지동,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충신동, 이화동, 연건동, 동숭동, 혜화동, 명륜동, 창신동, 숭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