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아나운서
강성곤
형설
2021년 3월 19일
노래 듣는 걸 좋아해 집에서는 늘 노래를 틀어놓는다. 그럭저럭 사 모은 음반이 적지 않으니 집에서는 불편 없이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현장에서 현장으로 넘어 다니던 젊은 날에는 라디오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듣기에는 말 수가 적은 클래식 방송이 제격이어서 KBS FM을 틀어놓고 지냈다. 프로그램 이름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음악의 산책’이었는지 ‘KBS 음악실’이었는지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여느 음악방송과 달리 그 방송은 진행자가 조금 독특했다. 대개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어조와 사연으로 방송을 이끌어 가는데 그는 지극히 절제된 어조로 작품과 연주자만 소개할 뿐이었다. 마치 음악 강의를 듣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목소리나 진행하는 품으로 봐서 상당히 연륜이 있는 아나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몇 년 전 페이스북에 그의 이름이 보였다.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친구 되기를 청했다. 친구가 되고 나서 보니 고등학교 대학교 겹 동문이었다.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내가 4회 졸업생이니 내 위로 많아야 세 살. 그보다 훨씬 많은 줄 알았는데 말이다. 더 놀라운 건, 글쎄 나를 선배라지 않는가.
그는 내게 클래식 방송의 진행자이자 KBS 한국어연구회의 주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가 올리는 글 역시 그답게 말과 글에 대한 지적이 주를 이뤘고 클래식 이야기도 언뜻언뜻 비쳤다. 간혹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입힌 ‘음악의 눈으로 세상 읽기’도 읽을 만 했다. 하나 의아한 것이 있다. 그는 독일 방송에 언급된 각종 시사 정치 현안을 자주 올렸다. 직접 방송을 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언급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자기소개 란에 독일에서 공부한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방송국에 적을 두고 있었으니 길어야 한 해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고 독일어를 전공한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재주로 독일 방송은 매일 모니터링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작년 봄에 그가 책을 냈다고 했다. 기다리던 전자책은 나오지 않았고 원수 같은 코로나가 길을 막아 종이책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귀국한 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그의 책을 읽었다. 요즘 한창 우리말 우리글 그리고 클래식 강연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KBS 강성곤 아나운서이다.
책을 읽어가다 중간쯤에 언급한 글을 보고 무릎을 쳤다. 아무 설명 없이 저자의 글만 올려놓고 글쓴이가 누구인지 질문해도 답이 나올 만큼 저자의 색깔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앞에서 띄어 읽기는 발음과 통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어디서 연결할 것인가, 어떻게 분절할 것인가, 강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감각 키우기다. 그 본령인 음악으로 치환하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도 지휘자의 곡 해석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녹음에서는 느리고 중후한 맛,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빠르고 산뜻한 느낌, 브루노 발터는 소박 담백한 미, 그리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경우는 모든 덕목의 조화로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부터 오이스트라흐, 하이페츠, 그뤼미오 같은 반가운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그들을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읽는 방법에 빗대어 차용하고 있었으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는데도 도저히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우디에서 근무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라 쓸 만큼 평생 흠모했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거론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현지법인에 부임하면서 뭔가 쉽게 부를만한 이름이 필요했고, 평생 흠모하던 지휘자를 따라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십 수 년을 살았다.)
앞서 나는 그의 음악방송이 ‘지극히 절제된 어조로 작품과 연주자만 소개해 마치 음악 강의를 듣는 느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자신의 해설을 ‘정격正格 해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음악에 묻혀 살았는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음악에 묻혀 살고 열심히 방송을 준비했다고 ‘연륜 있는 방송’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자는 굳이 다른 이유를 댈 것 없이 그것을 자기 재능과 강점으로 인정하면 좋겠다. 이런 내 말이 신참 아나운서였던 저자를 연륜 있는 아나운서로 오해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부리는 술수로 보이는가?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독일어에 흥미가 있었다고 했다. 아마 그를 가르치신 독어 선생님이 나도 가르치셨을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 때문에 독일어라면 치를 떠는데 그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니. 같은 물을 마셔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저자는 몇 차례 독일 출장에서 무게가 만만치 않은 중형 녹음기에 끔찍이도 무겁던 배터리를 몇 개씩 짊어지고 다니며 인터뷰해서 통일독일특집을 만들어내 방송사 최초로 아나운서와 프로듀서를 겸한 아나듀서라는 별명을 얻고, 기획하고 섭외하고 촬영하고 편집까지 맡아서 ‘괴테의 도시들’과 ‘라인강 유역의 사람들’이라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독일어 공부를 시작한다. 어문법 책과 참고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독일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고, 무엇보다 아침마다 독일 뉴스를 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살았단다. 그는 독일의 사회와 문화를 취재하면서 통역을 통해 전해 들어야 하는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고백하며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비로소 그가 가진 독일의 현안을 이해하고 전하는 능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습관을 지금까지 이어온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저자는 틈틈이 ‘객석’과 ‘음악동아’에 기고도 하고 CD 해설지를 쓰기도 했단다. ‘음악동아’는 창간부터 폐간까지 구독했고 ‘객석’도 상당히 오래 구독했으니, 게다가 클래식 CD도 적지 않게 사 모았으니 그의 글을 꽤나 읽었을 것이다. 미처 그의 글인지 의식하지 못한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와 여러 공간에서 마주쳤다는 생각에 깐깐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그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즐겨 찾는 국밥집에서 반주 곁들여 가며 음악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청할 용기가 생겼다.
저자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언제나 바른말 바른글 이야기로 넘친다. 한국어 지키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저자는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평생 갈고 닦고 쌓은 내공을 아낌없이 베풀어 왔고, 지금도 일반인을 위한 강의에서 그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내로라하는 여성 앵커들이 그가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제자들이라고 한다. 어느 날은 제자인 방송3사의 여성 앵커들이 동시에 저녁 뉴스를 점령하기도 했단다. KBS의 김민정, MBC의 배현진, SBS의 정미선 아나운서들이 그들인데, 훗날 JTBC의 안나경 아나운서도 이 대열에 합세하였으니 저자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하겠다. 저자는 그렇게 쌓아놓은 내공을 이 책 후반에서 아낌없이 풀어놓고 있다. 바른말 바른글에 관심 있는 이, 방송을 꿈꾸는 이, 입사시험을 준비하는 이에게 구체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좋은 음성을 갖고 싶은 이도 읽어볼만 하다.
좋은 음성이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싶은가? 그걸 여기에 다 풀어놓을 수 없으니 맛보기로 하나만 인용하자면,
“좋은 발음의 소유자가 나쁜 발성을 하는 예는 찾기 어렵다. 발성보다는 발음이요 그 발음을 바탕으로 하는 유려한 읽기가 이상적인 것이다.”
좋은 발음은 좋은 발성으로 이어지고 좋은 발성은 필히 듣기에도 좋을 것이니 결국 좋은 음성이 된다는 말 아닌가. 더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저자는 아나운서의 본령인 읽기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 하나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아나운서의 라디오뉴스를 모니터한 연구 결과 얼추 1분에 366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제 시 낭송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읽기의 속도가 대체로 빨라지는 추세를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380~385자 내외가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십 수 년 해외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말의 억양도 달라지고 무엇보다 말이 빨라져서 낯설다 못해 불편했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나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이런 종류의 책은 자칫 아재들의 고리타분한 자기자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게 일부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 동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게 마련인데, 나와 다른 길을 걸은 이들이 살아온 치열한 삶의 현장을 엿볼 수 있기도 했고. 독자를 흡인력 있게 끌어들이는 저자의 글 솜씨도 크게 한 몫 했다.
저자는 올해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은퇴가 목전이라는 말이다. 잘 마무리하고 지금 활약하고 있는 대중강연 무대에서 더욱 의미 있는 성취를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본인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고 풍성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강연을 통해 많은 이들이 실무와 교양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십 년 넘게 공들여 쌓아온 독일에 대한 이해가 어떤 형태로든 결실을 맺어 양국 우호증진 뿐 아니라 문화교류에도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때 저자가 그토록 싸고 맛있다고 추천한 베를린 빌머스도르프 거리에 있는 즉석 생선요리 집에서 그와 함께 아귀 튀김을 놓고 화이트와인을 곁들이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것도 참 멋진 일이겠다. 그게 가능하겠나만, 꿈꾸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떠랴.
책을 읽으려고 보니 한 손에 들어오는 예전 문고판 크기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도 분량이 적은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책이 좀 더 만만하게 보였다. 물론 편집자의 안목에 대한 칭찬이다. 책의 장정이나 크기에 압도되어 지레 읽기를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훌륭한 ‘독자 친화적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환갑 기념으로 만든 내 개인 문집이 딱 그 크기였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