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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눈에 선하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방송

by 박인식

권성아 외

사이드웨이

2022년 10월 12일


언제부턴가 방송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 통역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들을 위한 자막 방송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어 청각장애인의 불편이 이제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방송이 있다는 건 몰랐다. 간혹 자막 선택할 때 ‘음성 해설’이라는 항목을 보면서 그게 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필요한 기능이 아니니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얼마 전 화면해설 작가들이 책을 냈다는 광고가 올라왔다. 화면해설이란 시각장애인에게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설자가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서비스라고 했다. 해설자가 설명하는 원고를 쓰는 사람이 화면해설 작가라는 건 알겠는데 시각장애인이 TV나 스크린을 본다는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TV나 스크린은 시각 매체인데 시각장애인이 그걸 본다는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본 것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돕는 사회적 기능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게 반갑기도 해서 도서관에 구매를 요청했다. 십여 년씩 화면해설 원고를 써온 다섯 작가가 그들의 삶과 보람과 고단함을 책으로 펴냈다.


화면해설이라는 것이 새로운 직종이다 보니 작가들의 고충이 하나둘이 아닌 모양이다. 작가 자신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해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은 나름 자리도 잡히고 보람도 느끼지만, 하나같이 방송작가라는 것이 그렇듯 업무와 사생활의 균형을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늘 방송 일정에 맞춰 허덕이는 고단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단다.


어느 직업을 막론하고 고충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보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나는 그것보다는 여태 들어보지 못한 ‘화면해설’이라는 일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다. 화면해설이 무엇인지 설명해놓은 부분을 주의 깊게 읽고 나서 실제로 화면해설 방송을 틀어놓고 저자들이 설명한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짚으며 따라갔다.


“화면해설이란 시력이 약하거나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설자가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서비스(DVS, Descriptive Video Service)를 말한다. 영상 속의 장면이나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그리고 대사 없이 처리되는 모든 화면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화면해설이고,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화면을 해설하는 원고를 쓰는 사람이 화면해설 작가이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들이 보면서 이해하는데 빈 구석이 없도록 볼 수 없는 화면을 들려주는 일이기 때문에 들어서 보는 것 같은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 해설을 들었을 때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면 가장 잘된 화면해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면해설 작가들은 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자질 있는 작가라면 특별히 훈련을 받지 않아도 잘 감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 시간 방송에 필요한 대본을 쓰는데 열 시간 쯤 걸리고, 대본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를 찾고 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사전 작업에 또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한 시간짜리 방송 원고를 쓰는데 스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화면해설은 원래 영상 안에 있던 대사, 해설, 그 외에 꼭 필요한 배경음이나 효과음을 포함한 소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을 적용하다 보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너무나 비좁고 때에 따라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을 노리느라 안간힘을 써야 한다.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무엇을 중심에 둘 것인지, 그러면서도 가장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표현을 하려면 문장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한 장면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정보 외에 등장인물도 있고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도 있다. 그 등장인물이 움직이기도 한다. 화면해설 작가는 대사와 대사 사이, 혹은 해설과 해설 사이에 비는 10여 초의 짧은 시간에 이 많은 정보 중 가장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해설을 써야 한다.”


“화면해설의 어려운 점은 시간 제약이 크다는 것이다. 화면해설 작가가 쓰고 싶다고 해서 알려주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 쓸 수가 없다. 대사와 대사 사이, 배경음악 사이사이 짧은 시간 동안에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설을 해야 한다. 여유가 없으면 가장 중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우선순위대로 해설하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을 고려해서 정보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정보가 많아도 문제 적어도 문제이다. 그래서 화면해설 작가는 이 시간과 정보 사이에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판단해 이를 해설로 쓰는 역할을 한다.”


언젠가 합창단의 요청으로 외국 노래 가사를 번역한 일이 있었다. 일반적인 문장이라고 해도 저자의 의도와 감각을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데, 하물며 박자에 맞춰 글자 수를 조절하고 노래의 강약과 리듬에 어울리도록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 배치하는 일은 외국어를 안다고 덤벼들 일이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이후로 그건 나 같은 필부가 할 일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었다. 실제로 화면해설 방송을 들어보니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적절한 해설을 ‘우겨넣는’ 일은 가히 예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TV가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라디오 연속극이 위력을 떨쳤다. 당시는 그것이 국민 오락이었다. 연속극 할 시간이 되면 모두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숨죽여가며 열심히 들었다. 그래봐야 TV 드라마를 따라갈 수 있겠냐 싶지만, 초기 TV 드라마 수준에서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라디오 연속극만 오히려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화면해설 방송을 시각장애인이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들어봤다. 원래 방송에 들어있는 대화나 각종 음향과 화면해설이 겉돌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런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본 드라마였기 때문에 대사와 해설만으로 상황을 그려낼 수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마치 어렸을 때 즐겨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공들여 화면해설을 쓰지만 그것이 늘 화면해설 드라마를 보는 이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화면해설 드라마를 보느냐는 질문에 안 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설명이 너무 많아서 성가시다는 것이다. 화면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주인공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 대강 어떤 상황인지 아는데, 전화벨이 울리면 전화 온 줄 아는데 그걸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이다. 화면해설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는데, 해설이 너무 많으면 따라가기도 바쁘고 귀도 피곤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화면해설이 너무 적어 불만이라는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노을이 진다고 할 때 이제 막 하늘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는 노을도 있지만 해가 거의 넘어가서 검붉은 색 가까운 노을도 있으니 그런 것까지 자세히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차이는 대체로 선천적 시각장애인과 중도에 실명한 시각장애인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사물의 모양도 색깔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세히 해설을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엔 필요한 설명만 해설하는 게 낫고, 중도에 실명했기 때문에 사물을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좀 더 자세한 해설이 낫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저자는 화면해설 서비스가 꼭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서비스는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눈이 나쁜 사람들이나 노안으로 눈이 침침해진 노인들에게도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유니버설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연령과 성별, 국적, 언어, 장애 유무 등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 건축이나 환경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면해설 서비스는 원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고안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유용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된 것이다.


“예컨대 버스 정류장에서 현재 어느 방향으로 가는 몇 번 버스가 도착했다는 음성안내가 나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음성안내는 시각장애인 뿐 아니라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 버스를 이용하려는 노인,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두루 유용하다. 어린아이를 챙기느라, 스마트폰을 보고 있노라 버스가 온 줄 몰랐던 사람들도 음성안내를 듣고 바로 알아차린다.”


저자는 우리나라 화면해설 방송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고 설명한다. 2001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해 KBS <일요스페셜>과 MBC <전원일기>를 시험 방송한 후 2005년 TV 방송에서 전격 실시되었다. 이후 2010년 5월 <장애인 차별금지법 시행령> 및 2011년 7월 방송법 일부 개정으로 방송사업자의 장애인 방송이 의무화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지상파 방송사는 2013년 7월부터, 방송통신위원회가 지정하는 유료방송사업자는 2014년 1월부터 장애인 방송을 전면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모든 방송을 불편 없이 화면해설 방송으로 보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한다. 지상파는 대부분 재방송에만 화면해설이 제공되는데,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난 후 화면해설 작업이 이루어질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다시 보기’ 서비스를 통해서 화면해설을 볼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 OTT처럼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볼 수 없다 보니 화면해설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도 많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지 않고, 한 번 화면해설 방송을 놓치면 다시 볼 수 있는 방법도 거의 없다. 돈 주고 사겠다는 데도 현실에서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미국 법률에 따라 자막방송과 함께 화면해설 방송을 함께 내보낸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프로그램은 공개할 때 전 회차 화면해설을 제공하고,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해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동시에 넷플릭스에 방영될 때 다소 시간 차이는 있어도 화면해설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OTT는 화면해설을 제공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 방송 사업자는 유형에 따라 화면해설 방송을 연간 5~10%씩 편성해야 한다. 이 비율이 어느 정도 맞춰지는 11월말이나 12월이 되면 맡고 있던 프로그램들이 하나둘씩 화면해설 제작을 중단했다가 새해가 되면 다시 제작하기도 한단다. 작가에게는 일이 좀 줄어든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화면해설로 방송을 접하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잘 보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하차해야 하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정책이 눈에 띄게 개선되기는 했다. 정책을 이행하려면 재원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우선순위의 문제도 있으니 하루아침에 나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아직도 시각장애인들이 보고 싶은 방송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한다. 정책 입안자들이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좀 더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여론이 비등하면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 먼저 화면해설 방송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안내를 따라 화면해설 방송을 시청해 보기를 권한다. 물론 이 책을 먼저 읽은 후에.


“지상파 방송의 경우 지상파 3사, EBS와 OBS에서 시청이 가능하며, 유료 방송의 경우 종편 4사와 CJ ENM 계열의 채널, 그리고 일부 지상파 계열의 드라마 채널에서 시청이 가능하다. 드라마의 경우 지상파를 기준으로 일일 드라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의 재방분에서 화면해설방송이 송출되고 있다. 프로그램 시작할 때 화면 좌측 상단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방송 중’이 뜬다. 디지털 케이블, 스카이라이프, IPTV 셋톱박스로 시청할 때 메뉴 설정에서 화면해설 기능을 ON으로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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