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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05. 2022

성경 왜곡의 역사

Misquoting Jesus

바트 어만

민경식 역

청림출판

2006년 5월 15일


바트 어만 읽기


얼마 전에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읽다가 기가 막힌 구절이 있어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유진 피터슨이 기존의 성경을 자기 방식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현역 신학자가 써서 그런지 표현이 너무 생생해 즐겨 읽고 있다. 지인 한 분이 그 글을 보고 의역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메시지 성경>은 그 선을 넘었다고 지적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오래 전부터 성경은 해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살피고 따라야 할 것은 성경이 담고 있는 뜻이지 글자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되고 편집되고 필사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오류가 수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오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성경의 내용이 당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지식과 사고방식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을 살펴야 하는 해석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름 지적에 대한 내 견해를 달아놓기는 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신학자 ‘바트 어만(Bart D. Eheman)’에 대한 글이 자주 눈에 뜨인다. 언젠가 기독교인이 아닌 분이 그가 쓴 <두렵고 황홀한 역사 Heaven and Hell; A History of Afterlife>를 적극 추천해서 읽겠다고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게 생각났다. 찾아보니 제목만 읽고도 솔깃해졌다. 이 책 <성경 왜곡의 역사 Misquoting Jesus> 말고도 <예수 왜곡의 역사 Jesus Interrupted>,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How Jesus Became God>,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 The Triumph of Christianity>,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Lost Christianities>까지 모두 평소에 궁금해 하던 것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주제가 아닌데 이런 책을 계속 쓴 것을 보면서 문득 저자의 사상이 신학의 궤도를 이탈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께 여쭤보니 읽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진리는 아니라고 하셨다. 당연한 말.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일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초에 바트 어만이 쓴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 How the Bible Fails to Answer Our Most Important Questions>도 읽었다. 그때 써놓은 리뷰를 살펴보니 모태신앙인이었으나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전능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이 세상에 왜 이토록 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점차 신앙을 잃어갔고, 그러다 결국은 신앙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 소개를 읽고 잠시 멈칫해 가까운 목사님께 계속 읽어도 좋을지 여쭤본 일이 있었다. ‘바트 어만’을 읽어도 좋은지 두 번이나 확인한 셈이다.


실수로 인한 왜곡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의 지식수준이나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 없다. 저자도 성경 본문은 기록한 사람들의 시각ㆍ믿음ㆍ필요ㆍ소망ㆍ이해ㆍ신학이 반영된 것이다 보니 기록된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결과이고, 그러니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해서 내용이 같을 수 없고, 그것이 바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가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같은 성경 같은 구절이 서로 다른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구절이 서로 다른 것을 ‘이문(異文)’이라고 하는데,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바탕이 된 여러 사본의 ‘이문’은 수십 만 곳에 달한다고 한다. ‘수십 곳’이 아니라 ‘수십 만 곳’. 최근까지 밝혀진 사본이 5,700여종이라니 ‘수십 만 곳’이라는 숫자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이문’의 대부분은 하찮고 사소한 것이라고 말한다. 필사가 성경을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던 시대에 필사 과정에서 실수로 본문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포함한 모든 초기 기독교 문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문장에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고, 소문자 대문자를 구분하지도 않고, 단어와 단어를 띄어 쓰지도 않고(scriptio continua), 약자로 표시한 것을 단어로 오인하기도 했다. 글자를 빠뜨리는 것은 다반사이고 옮겨 쓰려는 본문 두 행이 동일한 단어나 동일한 글자로 끝날 경우 중간 문장을 빠뜨리는 일도 흔했다. 그러다 보니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 글을 읽는 것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일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나는 3년 째 성경을 써오고 있다. 이전에 쓸 때 성경을 보고 옮겨 적던 것과는 달리 성경을 출력한 용지 아래에 적는데도 글자가 틀리는 건 물론 문장을 통째로 빼먹는 게 비일비재하다. 성경을 필사해본 사람은 성경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일어나지 않는 걸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당대의 필사작업은 전문 필사가나 글을 아는 노예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갖고 싶어 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필사하다 보니 전문 필사가와 달리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때로는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기도 했지만 그것이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이문이 생기고, 그렇게 흘러가면서 ‘이문’은 점점 심각해졌다.


저자는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를 예로 들어 ‘이문’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소아시아(터키)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이다. 6장에 나타나있듯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불러준 것을 누군가 대필하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친필을 덧붙였다. 이때 바울이 한 마디 한 마디 불러준 것을 받아 적었을까, 아니면 바울이 골자만 불러주고 대필한 사람이 풀어서 쓴 것일까? 갈라디아에 교회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다면 편지를 여러 번 썼을 리는 없고 편지 원본을 교회 숫자만큼 필사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각 교회에 도착하면 교인들이 또 필사했을 것이고, 교인이 많으면 필사한 것을 다시 필사하지 않았겠나. 이것만 보더라도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은 수없이 많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갈라디아서 사본은 P46인데, 이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46번째 사본이라는 뜻이다.”


의도적인 왜곡


하지만 ‘이문’이 이와 같이 실수로 생긴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당시 이단 기독교인들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을 변개했듯이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 기독교인이 성경 본문을 변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자기들이 믿는 교리를 강화하기 위해 본문을 변개했다고 말한다.


이런 변개를 막기 위해 정통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 밖에 없었다. 저자는 다음 구절을 바로 그런 흔적으로 판단한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저자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 구절은 성경을 필사할 때 네 마음대로 바꾸지 말라는 말씀 아닌가. 이 구절을 ‘성경무오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의 판단대로라면 이것은 오히려 성경에 수많은 오류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후대에 덧붙여진 내용


마가복음의 말미인 16:9-20은 대부분의 성경에 [ ]과 같은 꺾쇠로 구분해놓고 있다. 원래 본문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 후대에 추가되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과 승천 기록이 모두 여기 들어있는데 그것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저자는 이 부분이 추가된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빼면 마가복음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이루어진 정경화작업 과정에서 이 부분이 어떤 이유로 멸실되었을 것으로 판단해 그것을 추정해 채워 넣었을 수도 있고, 편집자의 신앙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것이 마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겠고.


요한복음 7-8장에는 복음서 중 유일하게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이 부분도 원래 본문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래되고 신뢰할만한 사본에 이 부분이 나타나지 않고, 요한복음 다른 부분과 문체도 다르고, 사용된 단어나 문구도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본문비평학자들은 이 부분을 성경의 일부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건을 설교로 들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경(正經)화 작업, Canonization


우리는 27권으로 이루어진 신약성경을 사용한다. 그것이 전해 내려오는 기독교 문서의 전부는 아니고 그것 말고도 수많은 문서의 수많은 사본이 있다. 이 많은 문서 중 현재와 같이 27권을 정경(正經, canon)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맨 처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아타나시우스가 서기 367년 이집트 여러 교회에 보낸 목회서신에서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논쟁이 이루어졌고 여러 차례 종교회의를 거친 끝에 426년 신약성경 27권이 확정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정경화 작업이 끝나기 전에는 율법의 지속적인 타당성을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만,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그룹은 마가복음만, 마르시온과 그의 추종자들은 누가복음만,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은 요한복음만 복음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하나님의 영감에 힘입어 성경을 기록했다 하더라도 앞서 말한 대로 기록한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게 기록된 많은 문서 중에 일부를 정경으로 선택한 것도 그 많은 사본을 취합하고 분석해 성경을 완성한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저자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책’이라고 정의한 것도 지나치다 할 수 없겠다.


성경 바르게 읽기


저자의 논지나 주장은 학자로서도 그렇고 상식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었으나 내놓고 물어보지도 못한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어보기도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는 점에서 통쾌하기도 했고.


앞서 요약한 대로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이 지금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수많은 왜곡이 일어난 것을 유형별로 정리했고 뒷부분에서 각 유형에 따른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읽기는 했으나 모두 이해하기에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었다. 읽어보지 않은 저자의 다른 책도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처럼 총론만 읽어도 얻는 것이 많을 것 같이 기대가 된다. 저자인 바트 어만의 명성이나 그가 저술한 책으로 보아 상당한 원로 학자이거나 이미 고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성경이 왜곡되었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파고든다고 해서 내 신앙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상식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의 정진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펼치고 있는 주장을 압축해놓은 것 같은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본문 읽기는 필연적으로 본문 해석을 내포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 본문 읽기에 대해 다소 순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 읽기는 본문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즉 그 본문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라는 것은 실제로 그 본문 속에 고유한 의미로 존재하지 않으며 본문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본문이 스스로 말한다면 성실하고 솔직하게 본문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본문이 말하는 바에 대해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다양하며, 사람들은 본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다.”


“동성애 문제나 교회 내의 여성 문제나 낙태 문제, 이혼 문제,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 논할 때 양측 모두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똑같은 성서를 인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심지어 때로는 동일한 성서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본문이 명백히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서는 어느 독자에게나 의미가 분명한 말씀을 단순히 모아놓은 그런 책이 아니다. 본문이 어떤 의미를 지니려면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 과정 없이 비밀스런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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