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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진격의 10년, 1960년대

인문학자의 현대사 읽기

by 박인식

김경집

동아시아

2022년 9월 28일


인문학자의 현대사 읽기


김훈의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는 처음에 이 문장을 ‘꽃은 피었다’로 적었고, ‘꽃은 피었다’가 ‘꽃이 피었다’가 되기까지 담배 한 갑을 태웠다고 한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진술한 것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을 진술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도 그렇다. 나는 과연 역사적 ‘사실’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소설 문장에서도 ‘은’과 ‘이’가 사실과 의견으로 나뉘는데 더군다나 사관(史官)의 사상과 견해에 좌우되는 역사가 객관적인 사실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인문학자가 현대사를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십 년의 산물이라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어서 찾아보니 지난 대선 때 특정 후보에 기표한 투표용지를 공개했다는 기사가 첫머리에 올라와 있다. 역사는 해석인데. 책을 읽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도서관에 구매 신청해 등록도 하기 전에 먼저 가져온 책이니 그냥 반납할 수도 없고. 출판사의 책 소개 글이야 객관적일 수 없을 것이고, 신문에 올라온 서평도 천편일률적이었다.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개인이 올려놓은 서평은 찾지 못했다. 참고도서를 보니 (저널리즘의 자료 분류에 따른) 1차 자료가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 정도 윤곽을 가지고 읽으면서 판단하기로 했다.


한국 현대사는 4.19에서 시작해 전태일로 끝났고 세계 현대사는 비틀스에서 시작해 아폴로 11호 달 착륙으로 끝났다.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건이다.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니 의미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전해들은 것보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1960년대는 반세기 이상 억눌렸던 불만과 분노가 터져 나와 기존의 모순과 불의를 고발하고 이에 저항하며 맞서 싸움으로서 새로운 세계 질서와 구조를 구축했는데, 이런 현상이 특정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범(凡)세계적이고 전(全)지구적이었다고 서술한다. 격동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4.19가 일어나고, 프랑스에서는 68운동이 일어났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인권이 폭넓게 자리 잡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서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5.16이 일어나고,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홍위병의 광풍이 몰아치고, 베트남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으며,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로 인한 흑백갈등이 오히려 심화되었을 뿐 아니라 여성차별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소련과의 냉전 또한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비틀스의 인기가 세계를 휩쓸고, 킨제이 보고서로 성(性)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며, 히피와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문화가 되었다.


세상을 깨운 <침묵의 봄>


나는 서구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환경운동이 시작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줄은 몰랐다. 요즘 환경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기도 했고 최근 십여 년 관련 컨설팅에 참여한 일이 있어 <침묵의 봄, 세상을 깨우다>를 매우 흥미 있게 읽었다.


저자는 레이첼 카슨이 1962년 자신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 밝혀낸 DDT가 환경을 파괴하는 경로를 요약하고 그것이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깨운 촉매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살충제로 살포된 DDT가 나뭇잎에 묻고, 가을에 떨어져 이파리에 묻은 DDT가 흙을 오염시키고, 지렁이가 오염된 흙을 먹고, 지렁이를 먹이로 삼은 종달새가 400마리에서 20마리로 줄었다. 문제는 그것이 종달새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누구도 레이첼 카슨의 작업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듀퐁을 비롯한 화학기업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미국 농무부와 대형 농장주가 연대해 레이첼 카슨을 압박했다. 화학기업이 레이첼 카슨의 작업을 폄하하고 공격한 것이야 이해할 수나 있지만, 놀랍게도 그의 책이 살충제보다 더 독하다고 극언하는 언론이 속출했다. <Science>, <New York Times>, <Reader's Digest>조차 그의 책이 부정확하고 감정적인 표출에 지나지 않으며, 지나치게 단순화한 오류가 가득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레이첼 카슨이 주장한 내용은 이후 사실로 입증되었고 대대적인 환경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침묵의 봄> 내용이 궁금해서 찾았는데 대출 중이라 확인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첼 카슨의 저서도 수십 종인데다가 그에 대한 책도 적지 않고, (제목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면 그의 주장이 이론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평생 건설 분야에서 일했다. 자연 파괴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보니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이들과 충돌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가 참여한 일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환경보호를 이유로 사업을 저지하려는 이들 중에 과학자는 물론 제대로 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설계자로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도 막무가내로 환경파괴로 몰아붙이고, 관련 학회에서 전문적인 견해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저자가 설명한 대로 <침묵의 봄>에서 무엇을 주장했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대했으며, 최종적으로 레이첼 카슨의 주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졌는지 몹시 궁금하다. <침묵의 봄>이 반납되는 대로 읽어볼까 한다.


식민 통치와 인간 차별


중동이나 아프리카 지도에서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당사자를 배제한 유럽 열강의 자의적인 결정이었다는 걸 안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지도를 본 것이 수십 년이고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여겼으면서도 이유를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만큼 내게는 하찮은 일이었다. 저자는 그렇게 하찮게 여긴 직선 국경이 그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겼는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마음껏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독일도 뒤늦게 분할 경쟁에 뛰어들었다. 벨기에와 손잡고 식민지 쟁탈에 뛰어든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1884년 유럽 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 이른바 베를린회담을 통해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협의했다. 베를린회담 이후 1914년까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국가가 무려 50개에 달한다. 유럽 열강들이 제 입맛대로 금 긋고 나눠먹은 새로운 아프리카 지도가 탄생하자 수천 개의 토착 문화와 지역이 뒤섞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던 부족들 또한 타의에 의해 쪼개지고 나뉘면서 이들은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이질적 문화를 가진 다른 부족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아프리카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전리품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권력의 공동화가 일어났다. 영국이 지배할 때는 어느 부족도 영국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 간 충돌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국이 떠난 뒤 이 복잡한 갈등 구조는 정부의 안정성과 공공의 안녕을 크게 훼손했다. 역사성과 고유성을 무시한 식민 정책에 따른 인위적인 국경 분할은 그렇게 한 세기 이후에 아프리카에 수술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질기고 참혹한 내상을 남겼다.”


나는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웠다. 요즘이야 그렇게 가르치지 않겠지만, 그런 시각이야 말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호주 원주민 학살을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호주로 이민 온 사람들이 호주 대륙에 최소한 4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을 내쫓고 학살하고 그렇게 학살한 추장들의 시체를 박제해 박물관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Policy)를 고집해 유색인종을 오랫동안 배척해왔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호주가 식민지를 가지지 않았으니 제국주의가 아닐 수는 있지만, 이주민 주제에 원주민을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다못해 주인을 오히려 학살한 행위는 식민 지배보다 오히려 더 큰 죄악이 아닐까. 아직도 흑백 갈등이 만연한 미국도 그렇고 호주 역시 마찬가지로 인권을 내세워 다른 나라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같이 인권을 외면하는 나라로부터 조롱받아도 할 말이 없지 싶다.


저자는 영화 Hiddin Figures의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 NASA 여직원의 사례를 들어 미국에서 자행된 흑백 차별과 아울러 여성 차별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미국 민권법(1964)과 한 해 전에 발간된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 차별 철폐를 위해 여성들이 고군분투한 과정도 소개한다. 하지만 1968년 영국 대거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주장하며 벌인 파업 투쟁에 상당수의 여성이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서술한다. 적대감을 드러낸 여성 중 상당수는 남편이 포드 직원인 전업주부들로, 여성 노동자들 때문에 자기 남편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성 차별은 이와 같이 여성들조차 차별 개선 운동에 반대할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유리천정이 작동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1960년대에 대한 평가


저자는 1960년대에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서술한다.


“하나는 풍요에 길들지 않고 사회구조적 모순에 비판하고 저항하며 맞서 싸운 가장 용기 있는 시대였다. 두 차례 전쟁이 준 비극은 끔찍했지만 그에 비해 전후의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포근했다. 경제 회복이 가져온 엄청난 물질적 풍요는 이전에 누려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누구나 거기 쉽게 순응하고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때였다. 그러나 억압과 차별을 받았던 사람들은 용기를 내서 그 부당함에 대해 외치기 시작했고 피를 흘리면서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식민지와 제국주의 잔재가 거의 사라진 시대였다.”


저자는 1960년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차근차근 담백하게 서술한다. 정치에서 시작해 사회, 문화, 종교를 거쳐 환경에 이르기까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에게 조근조근 설명하듯 쉬운 말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고 있으니 쉽게 읽고 넘어가야 하는데, 처음에 가졌던 저자의 성향에 대한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해 행간을 읽으려다 보니 다른 책 읽는 것의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1부 마칠 때쯤부터는 더 이상 행간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저자는 각 사안을 깊게 들여다보는 대신 폭 넓게 조망하고 있는데, 이는 워낙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역사학자가 아닌 인문학자로서 1960년대가 갖는 의미를 찾아내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굳이 1차 자료에 연연해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특하게도 저자는 같은 주제를 여러 번으로 나누어 이곳저곳에서 다루고 있다. 한 가지 주제를 한 번에 끝냈으면 그것으로 그 사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겠는데 여러 번에 나누어 다루다 보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해 불편했다. 아마 시대를 좀 더 잘게 나누어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각 사안에 대한 상호관계를 생각해보라는 뜻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그런데 1960년대라는 짧은 기간을 굳이 잘게 나누어 비교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출판사의 안내나 신문 서평에서 이 책이 17개 주제를 다루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과 달리 같은 주제를 1부와 2부로 나눠 다루고 있고 글 꼭지의 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17개라는 주제 숫자를 꿰어 맞출 수가 없었다. 각주를 찾다가 책 뒤에 실린 참고 서적 목록에서 비로소 17개라는 주제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17개 주제를 앞에서 언급했더라면 각 주제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그렇게 배치한 저자의 의도가 뭐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각 주제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 주제를 병렬로 배치해놓은 것을 따라가면서 이것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궁금했다. 읽으면서도 어떤 기준으로 1부와 2부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3부에서 이렇게 병렬로 배치해 놓은 것을 아우르는 결론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예상했던 대로 3부에서 저자가 1960년대 전체에 대한 견해를 내놓고 있기는 한데, 앞에서 서술한 내용에서 도출된 결과라기보다는 저자가 평소에 갖고 있던 1960년대에 대한 이해를 정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고.


저자는 1960년대야말로 현대사 중에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비록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1970년대가 이보다 격동적이지 않았고 1980년대라고 이보다 잠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1960년대가 유독 현대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이유를 설명했더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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