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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15. 2022

예수 왜곡의 역사

Jesus Interrupted

바트 어만

강주헌 역

청림출판

2010년 5월 17일


성경에 대한 궁금증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고도 한참 지난 때부터였다. 성경읽기가 거듭되면서 그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은혜에 눈뜨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많은 부분이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기적은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서로 모순인 내용이 적지 않았고, 사랑보다는 분노와 징계의 화신 같은 하나님에 당황했으며, 상식에 반하는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문제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결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 전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읽으며 그런 갈증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바트 어만 읽기’에 나섰다. 앞선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는 모두 일곱 권으로,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 <성경 왜곡의 역사>에 이어 세 번째로 <예수 왜곡의 역사>를 읽었다. 우리말 제목은 <성경 왜곡의 역사>와 <예수 왜곡의 역사>로 다르지만 원 제목은 <그릇 인용된 예수 Misquoting Jesus>와 <가로막힌 예수 Jesus Interrupted>로 모두 저자의 전공인 신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이 해오고 있는 역사비평이 무엇을 연구하는 것인지 소개해놓은 저자의 글을 보고 놀라움과 기대가 한꺼번에 생겼다. 마치 내가 그동안 품어왔던 질문 목록과 같았기 때문이다.


“‘역사비평’이란 성경의 실제 저자는 누구인가, 성경 저자들은 어느 시대에 살았을까,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성경을 기록했을까, 그들은 그 시대에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당대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환경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성경 저자들은 어떤 자료를 사용했을까, 그 자료는 언제 사용된 것일까, 그 자료의 관점이 서로 모순되지는 않았을까, 그 자료를 이용한 저자들 서로가 관점이 다르고 자료에 대한 해석이 다르지는 않았을까,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이 다양한 자료에 근거했기 때문에 내적인 모순이 있지 않을까, 그 책들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당시의 맥락에서 의도했던 내용이 지금 해석되는 내용과 다를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 것이 성경의 원래 메시지를 왜곡한 건 아닐까, 우리가 성경에서 원래 사용했던 단어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성경이 부주의한 필사가나 원문의 뜻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원문을 고치고 싶어 한 필사가 때문에 바뀌었다면 어떻게 될까를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대한 이해


그동안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사람의 손을 빌려’ 기록된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이런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성경에서 수많은 오류가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영감이 어떤 모습으로 작용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경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으므로 어떤 오류도 없는 완벽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결코 그런 책이 아니다. 수많은 모순과 차이가 있고 틀린 곳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똑같은 문제를 여러 시각에서 그렸고, 그런 시각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의 시각에서 기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다. 성경은 여러 사람이 기록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다. 다른 사람에게 원대하고 중요한 생각을 하도록 영감을 북돋워주는 내용을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저자들은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기록하라고 인도했다는 의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저자들의 지식수준과 그들이 말하려 했던 의도를 감안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며 ‘재림’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위에, 하늘에, 구름 위에 하나님이 사는 공간이 있다는 생각, 또 예수가 그곳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지낸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육신으로 하늘나라에 올라갔고 육신으로 다시 이 땅에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름 위에 하나님과 예수가 사는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구름 위에는 대기권이 있고, 그 위로는 우주가 있으며, 그 위로는 수십 억 개의 별이 있다. 예수가 다시 이 땅에 내려올 거라는 생각이 ‘위’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면 현대인에게 예수의 재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대적 상황에서 의미가 통하도록 신화적으로 재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여성, 동성애, 혼외정사, 사형, 전쟁, 재물, 노예, 질병 등 성경에 담긴 모든 가르침을 현대적 상황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성경을 취사선택해 적용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율법으로 정죄하면서 정작 율법대로 예배 때마다 양을 잡고 피를 제단에 뿌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저자는 이런 모습이 성경에서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데 이미 ‘지적능력을 활용’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다


오래 전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을 마치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사람은 받아 적었다는 말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은 기록된 순간부터 성경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시간동안 치열한 토론을 거쳐 성경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저자들은 자기가 기록하는 것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성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자신이 생각하고 믿으며 설교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편지를 썼을 뿐이다. 훗날 누가 그 편지들을 모았고 그 편지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편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마가는 자신의 책이 다른 세 권과 하나로 묶여 복음서라고 불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 그 책이 약 30년 후에 다른 지방의 그리스도인이 다른 맥락에서 쓴 글에 비추어 해석될 줄도 전혀 몰랐다. 마가는 자신의 책이 그 자체로 읽히고 이해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와 요한 및 신양의 다른 모든 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다 보니 저자가 설명한 것 같이 성경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종교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열심히 연구하면 설명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 설명해도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저자는 성경 저자들은 때로 중요한 쟁점을 완전히 다른 식으로 이해했다며, 예수는 자기가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표적을 행했다고도(요한) 하고 그런 이유로 표적 행하는 걸 거부했다고도(마태) 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도(마태)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바울) 했다는 예를 들고 있다.


또한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저자의 관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 어떤 저자의 메시지가 다른 저자의 메시지와 똑같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면, 신약에 담긴 모든 책을 스물일곱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 고집스럽게 읽는다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크다고 말한다. 저자들이 지향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각 저자가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지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마태의 가르침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마가복음은 마가복음으로 읽고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경 각 권은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쟁점을 다루기 위해 쓰인 것이므로 중요한 쟁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저자의 말은 이와 같이 성경은 다른 저자가 다른 의도로 기록했기 때문에 중요한 쟁점에서 견해가 다르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런 점을 감안해 성경을 입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 말고 더 중요한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약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나 사도가 기록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는 익명으로 기록되었고 저자들 중 누구도 자신이 목격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처럼 복음서 제목에 이름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제목들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즉 복음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권위자가 누구인지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집자가 덧붙인 제목이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자신의 책에 마태복음이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마태복음이란 제목을 붙인 사람들이 그 복음을 마태가 썼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게다가 마태복음은 3인칭으로 쓰였다. ‘그들’ 즉 예수와 제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말할 뿐 ‘우리’ 즉 예수를 비롯한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태가 예수의 제자가 된 사건을 다룰 때조차 마태복음은 ‘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라고 말한다.”


놀라운 일이다. 저자가 이렇게 언급한 바탕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성경을 기록할만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언급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갈릴리 유대인이었으므로 예수처럼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시골 사람이었으므로 헬라어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헬라어를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복음서가 원래 아람어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간혹 있었지만 요즘에는 언어학적인 이유로 복음서가 모두 헬라어로 쓰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로마제국에서 시민의 10%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각 복음서에 담긴 이야기들은 나름대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어 이야기를 구성할 줄 알고 문학적 목표를 적정한 수준까지 이루어낼 수 있을 만큼 고도로 훈련된 저자들이 쓴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저자는 복음서는 예수의 동역자들이나 그 동료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 다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수십 년 후에 기록한 것으로 판단한다. 저자는 신약 스물일곱 권 중에 여덟 권만 세상에 알려진 저자와 실제 저자가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 여덟 권은 바울이 쓴 일곱 권(롬ㆍ고전ㆍ고후ㆍ갈ㆍ빌ㆍ살전ㆍ몬)과 요한계시록(그러나 이 요한이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다)이며, 나머지는 저자가 잘못 정해졌거나, 동명이인이거나, 거짓 저자의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잘못 정해진 책은 익명으로 쓰였다가 나중에 독자나 편집자에 의해 유명한 사람의 저장으로 주장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동명이인에 의해 쓰인 책이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한 분 밖에 없다면 어떻게 예수가 신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구약에는 ‘고통 받는 메시아’라는 개념이 없으며, 그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를 메시아로 내세우기 위해 그를 뒷받침할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고, 그래서 초대교회는 성경만 만든 게 아니라 교리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 받는 메시아,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저자의 주장을 잘 따라왔는데 이 부분에서는 멈칫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가 모두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니. 여기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주장은 합리적인 이성으로 수긍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저자의 주장을 좀 더 따라 가보자.


“신약 전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구절은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한 곳 뿐이다. (이것도 삼위일체를 뒷받침한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헬라어 필사본에는 이 구절이 대부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이것 말고도 성경 전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그렇듯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보면 어떤 구절이든지 떼어 기독교의 교리에 맞출 수 있다.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다. 그런데 신적인 존재인 예수가 나타났으니 이를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예수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찾아낸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결국 ‘삼위일체’는 성경에서 딱히 이렇다 할 근거를 찾기 어려워 초대교회에서 만들어낸 교리라는 것인데. 삼위일체 교리를 들은 것이 수십 년이 넘는데도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혹시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도 신앙을 이어오는데 어려운 점이 없었으니 이런 주장을 접했다고 신앙이 영향 받을 일은 없겠다만. 아, 그래도 감당이 안 된다.


저자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고통 받는 메시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교리를 펼쳤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린 벌을 끝내고 기름 부은 왕을 다시 세워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왕이 메시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다시 독립국가로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다시 말해 고통 받는 메시아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니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사야 53:3-6과 시편 22:1-8을 ‘고통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해냈다. 하지만 이는 메시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어디에도 그 대상이 메시아라고 언급하지 않았고, 유대인들도 이 구절을 메시아와 연관 지어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와는 달리 예수는 고통을 받고 죽었다. 그가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순을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부활 기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초대 교회 교인들의 발명품인 셈이고, 유대인들은 당연히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터무니없이 들리기 때문에 도리어 옳다는 논리를 폈다(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18 -25).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삼위일체 교리’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별 문제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비평은 신앙을 해치는가?


‘삼위일체’와 ‘고통 받는 메시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고민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기 충분해 보인다. 저자인 바트 어만은 노년에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저서 곳곳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도 ‘성경에 배어있는 인간의 해석과 실수’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떠난 것이라고 누누이 밝히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도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반응을 염려했던지 저자는 이 책은 단지 역사비평 학자들이 성경에 대해 밝혀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였으므로 역사적으로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맺는다.


“나는 기독교를 공격할 생각도 없고 신앙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증명할 생각도 없다. 나는 성경과 초기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신약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이다. 학자들이 신약에 대해 무엇을 알아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의견들은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폭넓게 인정받는 것이다. 대부분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일하는 목사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설교단에서는 물론이고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내용을 교인들이 알게 되면 믿음의 위기가 닥치고 심지어 믿음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역사비평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설명한다고 해서 무신론에 빠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덮어둔 채 성경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진중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저자의 설명대로 라면 이것은 새로운 학설도 아니고 이미 많은 목회자들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이다. 그러니 한 번 읽고 끝낼 주제가 아니다. 나름의 답을 찾을 때까지 좀 더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기회 닿는 대로 묻고 배우고 또 묵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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