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비아토르
2022년 12월 15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책을 하나 받았다. 며칠 전 담임목사께서 공개하신 새 저서였다. 칠백 쪽이 넘는다고 해서 베고 자면 모를까 누가 그걸 읽겠느냐고 불평했던지라 조금 찔리기는 했다. 살까말까 망설였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동안 교우들에게 보낸 ‘매일 묵상’을 정리해 엮은 것이어서 받아들고 그저 매일 해당하는 날짜의 글을 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저녁에 들을 강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은지라 집에 다녀오기는 그렇고. 근처 찻집에서 책을 펴들었다. 앞부분 살펴보고 신문이나 읽을 참이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내쳐 세 시간을 읽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읽고, 아침부터 읽고. 그래서 이틀 만에 그 벽돌 책 읽기를 마쳤다.
‘매일 묵상’이니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락을 나눌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놓지 않고 한 달음에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루터교회에 출석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가 거기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 어제 설교 말씀도 그랬다. 세례 요한조차도 예수께서 오실 그리스도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이냐 묻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럴 만큼 예수의 행보가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너무 달랐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본질에 집중하셨고,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던 본질과 무관한 일은 외면하거나 배척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한국 기독교의 문제인지 기독교 전반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대부분이 본질이 아닌 것에 대부분의 열정과 자원을 쏟고 있고, 그러다 보니 정작 본질은 실종되어버렸다. 한국 교회에서 떠나 있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평생 헌신한 것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쳐 한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여느 때처럼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리뷰를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가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모아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내 생각을 붙이는 것은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벽돌 책이다 보니 부담감부터 앞서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힌다. 한 달음에 읽어도 좋고, 매일 해당하는 날짜의 글을 읽는 것도 삶을 정돈하는데 유익하겠다. 어쩌면 그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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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회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하나의 세례, 한 성령을 받은 교인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하나로 품어내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오가는 대화도 특별합니다. 서로 통하는 사람끼리 대화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배경,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생각이 같거나 세계관이 같은 사람만 만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일종의 모험이고 탐구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 사귐도 그러해야 합니다.
<신앙> “나는 내 평생 내 신앙을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없고 흔들려 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목사인 저도 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신앙이란 순례자의 길과 같아서 걷다 지치고 주저앉을 때도 있습니다. 매번 흔들리고 의심하고 절망합니다.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이런 험한 길을 걷고 있지?” 의심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걷다가 종점에 도착해서 주님이 맞아주실 때 비로소 우리가 걸어온 신앙의 길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매번 의심하며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배> 내가 무언가를 준비해서 주님께 올려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주님이 연약하고 지친 우리를 불러 어두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주님이 죄인을 위해 베푸시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 은총의 수단이 바로 말씀과 성찬입니다. (루터교회는 매주 성찬을 나눈다.)
<죄의 용서> 사탄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는 다 부질없는 짓이고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전쟁터에서 똑바로 서있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럴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복음’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이 복된 약속인 ‘복음’을 근거로 하는 것이고, 기도할 때마다 이 약속을 더 깊이 되새기는 것입니다.
<기도> 그저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지고 진실하게 기도하면 됩니다. 더러는 주님이 이미 우리 쓸 것을 알고 계시니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우리 염려와 궁핍을 해결해주실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사람은 교만한 성경 해석자가 아니라 엎드려 탄식하며 기도하는 작은 자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게 될 것”아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만 붙이면 기도가 완성되고 응답이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분부하고 명령하신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에 붙은 ‘아멘’이라는 종결구는 단순한 종결어미가 아니라 새로운 결단과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입니다.
<구원> 죽은 다음에 저승에 준비된 황금 집에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무엇인가를 풀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억눌린 모든 것에서 풀려나는 해방이고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고 망나니처럼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으로 얻은 자유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삼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사람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자 자기기만입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순종해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이런 만선의 기쁨을 대박나는 성공으로 바꿔버리면 곤란합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부들을 찾아오고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배를 인도하고 예상치 못한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지혜와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제자>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을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도 무언가 특별한 일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예수와 더불어 사는 것, 소외되고 약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샬롬> 분쟁이 없는 상태, 모든 것이 온전한 상태, 진리 안에서 조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 하나 되기를 추구하되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힘으로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폭력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불의와 악을 보고 눈 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역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샬롬’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고 불의와 악에 저항하자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입니다.
<마음의 가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상태를 뜻합니다.
<지도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의 흔적을 남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섭섭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거나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 길을 함께 걷자고 권면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위로> ‘지구 방위에 여념이 없다는 중학교 2학년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즘 청소년 대부분이 그렇듯 거의 모든 대화가 단문으로 끝났습니다. 말에 감정이 실려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심을 담아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별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생활이 힘들고 시험도 걱정되겠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 다 죽기 살기로 산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더라. 사는 방법에는 해답이 없어. 천천히 가도 괜찮아.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할 수 없어.” 아이를 보내고 밤새 생각이 났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말로 기다리는 마음 깊은 곳의 소리는 “괜찮아”가 아닐까요?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주님의 말씀도 알고 보면 거창한 영성훈련에서 얻어지는 비범한 무언가가 아니라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줄 때 “괜찮아” 하고 다독이는 소리가 분명합니다.
<불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묵상할수록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단순히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름도 국적도 모를 강도 만난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중 누구도 이런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교회도 위기가 닥치면 해법을 찾아 나섭니다. 너도나도 다양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세미나를 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런 프로그램과 잔기술로 위기를 넘기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만의 일, 기도와 찬송, 말씀과 성찬으로 생명을 이어갑니다. 이것이 지난 2천 년간 수많은 위기를 통과해온 교회만의 해법, 위기에 빠진 성도들의 해법입니다. 세상은 분명히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남 탓만, 불평만 하는 건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일수록 악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도 높이고 사회참여도 해야 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절망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