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by 박인식

브렉시트 유감 (2016.07.01)


이번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서 드러난 문제의 본질은 경제적인 현안을 정치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일반 시민은 이러한 고도의 정책적 결정을 내릴 만큼 현안에 익숙하지 못하다. 실제로 EU 탈퇴에 찬성한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숫자가 브렉시트 투표를 노동당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해했을 뿐, EU를 탈퇴했을 때 일어날 파장이 이 정도일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맨슈어 올슨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이해하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현대인들은 직접 연관되지 않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려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 무지(rationally ignorant)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번 경우가 바로 정치인들이 시민의 합리적 무지를 악용한 사례가 아닐까 한다.



직접민주주의 (2016.07.01)


우리가 직접민주주의의 효시로 여기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는 ‘규모가 아주 작고 동질적인 집단에서 노예와 여성에게 생산을 전담시켜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던 남성 시민집단이 행한 것’이다. 결코 모든 시민이 참여한 것이 아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아테네의 경우 인구는 30만 정도에 정치에 참여한 시민은 3만 안팎이었다. 말하자면 매우 특별한 조건에서 소수에 의해 실현되었던 체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의 영토와 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사회적 기능이 분화되고 전문화 된 현대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런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대의제 때문이 아니라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가치에 맞게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정당의 후진성을 생각한다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현실적인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의사를 수렴하여 이를 정책에 합리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정당을 감시하고 격려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선택지는 대의민주주의로 한정되어 있는데 정당의 후진성을 비난한다고만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국민투표 (2016.07.01)


국민투표는 국가의 중요의제를 국민의사를 직접 물어 결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국민이 국가적 의제를 판단할 만큼 현안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정권 주도세력이 정략적으로 악용할 소지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모든 이가 책임진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모두 여섯 차례 국민투표가 있었고 그 중 다섯 번은 집권세력의 정략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최소 77%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나. 이번 브렉시트 투표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났는데, 이를 반면교사 삼아 정치권에서 국민의사라는 미사여구로 자기합리화 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 (2016.07.05)


때로 하나님께 내 고통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내게 베푸신 하나님 은혜가 기억나고 그로 인해 고통 중에도 평강과 위로를 깨닫게 된다. 어디 하나님께서 손이 짧아 내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시고 지혜가 모자라 내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시겠나. 그러고 보면 기도는 하나님께 내 고통을 헤아려 주십사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로 인해 평강을 누리고 위로를 받으며, 궁극에는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정미조 (2016.07.15)


37년 만에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고 한다. 노래를 좋아한 만큼 그에게 호감을 가져본 일이 없어 그러려니 했다. 오늘 그가 방송에 출연해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예순 여덟. 은퇴를 했어도 벌써 했을 나이에 어떻게 가수로 돌아올 생각을 했는지 의아했는데,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노래가 더 깊어졌고 거기에 기품도 더해졌다. 무대를 떠난 지 37년인데 애를 쓴다고 목소리가 돌아오겠으며, 더구나 칠십 가까운 나이에 어떻게 음정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의문을 불식시킬 만큼 그의 노래는 편안했고 아름다웠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나이가 들어가며 아름다워지는 사람을 보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염려 (2016.07.22)



지난겨울 설교를 듣는 가운데 크게 때달은 바가 있어 오랜 세월 나를 누르고 있던 염려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다. 염려로부터 놓여나니 얼마나 편안한지, 그 짐을 왜 그렇게 미련스러울 만큼 붙들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문득 그 염려라는 것이 내게 늘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남보다 앞날을 조금 더 걱정한 까닭에 문제에 부딪혔을 때 덜 당황할 수 있었고 슬기롭게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내 염려까지도 사용해서 내 길을 예비해주신 주께 그저 감사.



기도 (2016.07.22)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야 할까. 다만 늘 기도하는데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 뜻에 더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기로 작정하신 은혜가 한량이 없을 텐데 우리 욕심과 우리 죄악으로 그 은혜를 받아 누릴 그릇을 깨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기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적어도 은혜를 담을 그릇을 깨는 일은 줄일 수 있지 않겠나.



믿음의 증명 (2016.07.22)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그걸 어떻게 증명하며 사는가?



염려 (2016.07.25)


염려는 복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니 불신이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배려 (2016.07.26)


남을 배려하는 것은 선한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아픔을 겪지 않고는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매우 가난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남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생각해왔다. 돌아보니 내가 겪었던 가난한 세월은 그저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만큼 오래 전 일이다. 지금은 더 이상 가난하지는 않은데, 그래서 남의 아픔을 이해할 만큼 아픔을 겪지도 않고 아팠던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아직도 내가 겪었던 아픔 때문에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나름 남을 배려할 줄 안다고 착각하며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2016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