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핑컬스타인, 닐 애셔 실버먼
오성환 번역
까치글방
2002년 9월 23일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는 읽을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든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적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성경의 인물이 된 것처럼 빙의해 가슴 속에 있던 울분을 털어버릴 수 있어서 그렇다. 언젠가 요르단 ‘왕의 길’에서 아라바 광야를 내려다보며 광야를 떠도느라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며 감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느보산에서 내려다본 모압광야는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물경 이백만에 이르렀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품기에는 턱없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려니 했던 일이 질문으로 쌓여갔다.
성서비평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고, 또 그 과정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신비의 영역에 있던 성경이 차츰 일상의 수준까지 내려왔다. 누구는 그것 때문에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만 나는 오히려 일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이어서 좋았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발간된 지 20년도 넘은 책이어서 도서관을 뒤지고 한참 순서를 기다려 읽기 시작했다.
저자인 이스라엘 핑컬스타인과 닐 애셔 실버만은 각각 텔아비브대학의 고고학연구소 소장으로, 벨기에에 소재한 에나메 고고학연구소 역사해석책임자로 일하는 고고학자들이다. 그들은 제목에서처럼 성경을 고고학의 대상으로 접근해 그것이 전설을 조합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하지만 전설을 조합한 것이라는 결론은 해석의 영역이니 읽는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저 그들이 발견하고 확인한 고고학적인 결론에만 집중해 읽었다.
저자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 일어난 지역에 대한 광범위하고 치밀한 고고학 조사가 오랫동안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고대 문서 뿐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예루살렘 신전산 일대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부터 시작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적지 조사까지 결과를 망라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냥과 채집생활을 했던 원시인들이나 유목민들이 남긴 매우 희소한 자취조차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현대 고고학의 수준을 밝히고 있다.
“출애굽은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고고학 발굴단이 산악지역을 포함해 시나이반도 전역을 반복해 탐사했으나 출애굽 당시의 야영지나 정착주거지 흔적이 단 한 곳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당시 유목생활을 입증하는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출애굽 시기인 후기 청동기시대(BC 1550-1150) 인간 활동의 증거도 찾지 못했다. 출애굽기에 언급된 지명은 실제로 존재했으나 거기에 주민이 산 것은 출애굽 시기보다 훨씬 전이거나 훨씬 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유랑할 때 겪은 여러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시대에는 그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지명이 있고 사람도 살았지만 출애굽 당시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저자는 출애굽의 배경은 성경에 기록된 기원전 13세기가 아니라 이보다 6세기나 늦은 기원전 7세기였다고 결론짓는다. 이 결론은 단지 시기적 배경이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출애굽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시기보다 ‘늦게라도’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출애굽기의 기록시기’를 기원전 7세기 후반과 기원전 6세기 전반, 이집트의 제26왕조 시대로 판단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래야 했을까? 저자는 출애굽기가 기원전 7세기 유다 민족부흥에 이용하기 위해 족장전설과 족보에 관련된 다른 단편적인 전설을 더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판단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문학적 허구로 폄하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출애굽기를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결합해 탄생한 민족 서사시’라고 평가한다. 그래도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이집트 문서 가운데에는 가나안에 관한 풍부한 증거가 존재한다. 이에는 이 시기에 이집트의 속국이었던 가나안 여러 도시국가 군주들이 보낸 서한도 들어있다. 서한을 보낸 가나안 군주들 가운데에는 예루살렘, 세겜, 므깃도, 하솔, 라기스 같은 가나안 도시국가의 몇몇 왕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각종 문서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은 가나안 지역의 각종 사건을 관리하고 면밀하게 감시했다. 여호수아서에서 세력이 강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가나안의 여러 군주들은 사실상 측은할 정도로 세력이 허약했다. 가나안은 이집트가 가나안 전체에 대한 안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방어용 성벽이 불필요했을 뿐 아니라 파라오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성이나 큰 건물을 지을 수단도 없었다.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한 무리의 피난민 집단(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전역에서 대대적인 파괴활동을 벌이는 동안 가나안 곳곳에 배치된 이집트 수비대들이 방관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이 집단이 이집트의 속령 도시 여러 개를 파괴한 흔적이 이집트 제국의 방대한 기록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여리고는 기원전 13세기에 주민이 거주한 흔적이 없다. 그 이전에 건설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작고 빈약한 규모였으며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 거주지 터에는 파괴의 흔적도 없었다.”
그냥 그런 일이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윌리엄 폭스웰 울브라이트는 언어학, 역사학, 성경학, 고고학의 탁월한 학자였는데 그는 고고학 증거를 해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족장들이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학계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마침내 포기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 역사 저자는 ‘민족 서사시’로 판단한다. 성경 필자들이 전설의 시대적 배경과 장소를 기원전 7세기 주변지역으로 바꾸어 ‘민족 서사시’로 내용을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한 민족의 간절한 소망과 각종 비전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고전적인 작품”으로 평가한다.
“예루살렘 발굴조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이 대도시였다는 증거를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솔로몬이 건축한 것으로 믿었던 기념건축물 대다수는 다른 왕들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서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가진 것으로 기록된 다윗이나 솔로몬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이집트의 메소포타미아 문서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신전산 일대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솔로몬의 전설적 신전이나 궁전의 자취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지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기원전 10세기에 주민이 거주한 것을 입증하는 뚜렷한 유물을 찾아내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념건축물의 흔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토기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다의 영화를 언급한 성경의 유례없는 묘사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다윗과 솔로몬, 르호보암의 시대에 고원지대의 작은 마을 이상의 규모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확고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대규모 군대를 전쟁터에 배치하는 데에 필요한 부와 인력, 조직수준을 나타내는 고고학적 흔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윗과 솔로몬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19세기 사해 동쪽에서 발견된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 따르면 다윗 왕조가 가나안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유다 왕조를 세운 다윗이라는 인물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말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많은 학자들이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유적은 로마 통치 초기 헤롯왕이 신전산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조차도 이후에 기각되었다.
저자는 ‘성경 폄하자’라고 비난받은 토마스 톰슨, 코펜하겐 대학 닐스 패터 렘케, 셰필드 대학 필립 데이비스 같은 성경학자들은 다윗과 솔로몬, 이스라엘 통일왕조,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의 사실상 전부가 포로생활 이후 시대 혹은 그리스 통치시대에 예루살렘 제사장 집단이 솜씨 있게 만들어낸 교묘한 사상적 창작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정도까지 이르니 나도 당황스럽다. 이를 순화하면 “후기 왕조시대에 다윗의 후예 및 이스라엘 전 국민의 운명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정교한 신학이론이 개발되었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이에 더해 아래와 같은 결론으로 이 책을 읽고 당황스러워할 독자에게 오금을 박는다.
“몇 년 전까지도 성서 고고학자들은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다가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완전히 발달한 왕국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초기 유다 왕들의 건축 활동과 효과적인 행정을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통일왕국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희망적인 생각의 소산’에 불과했다. 솔로몬의 후계자들이 건설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기념비적인 여러 건축물 또한 그랬다. 유다 왕국 전역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 여러 요새(대하 11:5-12)는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루살렘 북쪽의 유적지인 텔엔-라스베에서 발견된 거대한 요새 터를 성경의 도시 미스바에 유다 왕 아사가 만든 방어시설(왕상 15:22)과 연관 지은 것도 허위로 밝혀졌다. 솔로몬의 여러 성문 및 궁전과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왕조의 건축 활동은 그전 특정한 왕의 재위시대보다 근 200년 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오늘날 밝혀졌다. 초기 유다 왕들은 권력이나 행정능력 면에서 북쪽 왕들과 견줄 수 없다는 사실을 고고학이 밝혀주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두 개의 다른 세계였다.”
이쯤 되면 그동안 성경을 진리로 알고 그렇게 믿어온 그리스도인으로서 난감한 걸 넘어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한 대로 “족장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고, 출애굽은 실제 사건이 아니며, 가나안 정복은 없었던 일이고,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 번영한 통일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세5경을 비롯한 역사서가 묘사한 곧 성경시대의 이스라엘이 과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 가졌던 질문을 풀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오늘 구약의 사건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보게 되는 데까지 왔다.
성서 고고학자인 저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 나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말미에 써놓은 저자의 말 한 마디에 그 모든 걱정이 가라앉았다. 성서비평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충격 받은 게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데도 내가 그다지 흔들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의 진실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벽이 나팔소리에 무너지고 다윗이 팔매 돌로 골리앗을 죽인 것 같은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충실한 역사적 ‘증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서사시의 위력은 인간의 해방, 압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사회적 평등의 추구 같이 시공을 초월한 여러 가지 주제를 설득력이 강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데에서 우러나온다. 성경은 모든 인간사회가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공동의 기원, 체험, 운명의식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식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것 뿐 아니라 더 많은 분량을 고대 이스라엘의 흥망에 할애하고 있다. 그 부분은 익숙하지도 않고 외계어 같은 설명을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훑고 지나갔다.
이 책을 읽고 많은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하겠다.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과 수십 년 쌓아온 사연이 있어 괜찮기는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큰 시험에 들 뻔했다. 그러니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