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준
뿌리와이파리
2022년 9월 26일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꼽아 놓기는 했는데 내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미뤄두었다. 그러는 사이에 ‘삼프로’에서 저자의 방송을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고 하니 대출을 기다리는 사람이 늘어섰다. 모처럼 들은 독서방송 ‘책걸상’에 저자가 출연했다. 웬일인가 했더니 강양구 기자가 부추겨서 이 책이 나왔다더라. ‘삼프로’보다는 짧고 알아듣기도 쉬워서 한 번에 다 들었다. 진행자 눈높이에 맞췄을 것이다. 강 기자를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관련 산업계는 물론 외국에서도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전문적인 책이라면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것도 책읽기를 망설인 이유가 되었다. 두어 달 기다린 끝에 대출 예약한 차례가 되었다. 생각만큼 두껍지 않은데다가 이미 들은 것도 있어서 앞부분은 쉽게 읽어나갔다. 뒤로 가면서 내용이 어려워지고 전략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대충 건너 뛰어가며 읽기를 마쳤다. 다시 살펴보니 기술보다는 경영판단에 관련한 부분을 흥미 있게 읽었던 듯싶다.
어떻게 우리가 일본을 앞설 수 있었을까, 중국이 우리를 추월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읽기를 시작했다.
일본의 조심성이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쌓아 올라가는 소위 ‘빌드업’ 경영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저자는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애써 확보한 시장점유율을 잃지 않고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설계와 생산을 묶어놓는 수직계열화를 추구한 것이 패착이었다고 판단한다. 소극적이고 수비적인 경영이 원인이었던 셈이다. 수직계열화 된 산업이 제 궤도에 오르면 공정이 최적화 되고 의사결정 시간이 단축되며 표준을 더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어서 안정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데, 일본 기업들은 이 이점을 유지해 20여년 세계시장을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반도체 칩 설계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공정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설계와 생산이 통합된 방식은 더 이상 큰 이점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설계와 제조가 이원화되면서 각 분야에 특화된 기술이 더 집중적으로 개발되었고, 맞춤형 칩을 만들기 위한 설계수요가 증가하면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제조 기술도 동반 발전했다고 말한다. 수직계열화를 고수한 일본이 이 혜택을 받지 못했고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경우를 흔히 릴레이에 빗대어 설명한다. 뛰쳐나갈 사람보다 달려 들어오는 사람이 더 빠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통을 넘겨주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인데. 일본이 그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신뢰의 문제일까, 아니면 매몰 비용의 문제일까?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저자는 지나칠 정도로 수율에 집착했다는 점을 꼽는다. 일본정부가 주도한 전략적인 구조조정의 결과로 태어난 엘피다 메모리는 공정수율이 98%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문제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공정수율이 오로지 기술만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엘피다는 그 수율을 달성하기 위해 품질 검사에 과도한 투자를 했다. 그밖에도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연구개발 인력만 우대하고 마케팅 인력보다는 기술개발 인력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내린 것이 기술변화에 대응하는 속도를 늦췄고 이것이 몰락을 재촉한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고 기어이 역전시킬 수 있었던 방법은 굳이 뒷장을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만하다. 수직계열화를 벗어버리고, 불량률을 개선하기보다는 원가를 낮추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삼성은 수율이 80%에 불과했다. 20%는 폐기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삼성은 굳이 수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 생산량을 늘려서 생산원가를 엘피다에 비해 1/3 이상 절약할 수 있었다.
역전의 계기가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이 포화되어 가는데다가 삼성과 현대가 빠르게 신기술을 개발하며 양산 규모를 늘려가자 일본 기업들은 담합해 덤핑 전략을 취했다. 삼성 역시 이 과정에서 1,400억 원이 넘는 적자가 발생했지만 오히려 더 공격적인 투자를 결정했고, 그 결과 1992년 64Mb급에서 기술격차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기업은 덤핑으로 매출이 급락해 자금 회수 압박을 받게 되자 제품 개발이 늦어지고 양산 기술 개발 확보도 늦춰지는 이중고를 겪은 것이다.
한 마디로 의사결정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삼성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설명하지 않는다. 한 곳에서 스치듯 오너가 그 결정을 밀어붙였다고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들은 바가 있으니 나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좋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재앙을 맞게 되지 않았을까. 삼성의 지배구조에 대해 많은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그를 따르자니 저와 같은 의사결정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예전처럼 끌고 가자니 위험천만하고. 그저 그 체제의 좋은 점만 발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나.
삼성이 앞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 저자는 선두업체와 기술격차를 줄이면서 동시에 선행기술을 개발하는 전략을 취했다는 점을 꼽는다. 그것이 1986년 1Mb급 DRAM 개발, 1998년 4Mb, 1990년 4Mb급 개발로 이어졌고 1990년에 이르러 16Mb급, 1992년 64Mb급에서는 오히려 기술격차가 역전되었다. 그러던 삼성이 1990년 초반 이후 선행기술을 적어도 두 세대 이상 먼저 개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고 1996년 세계최초로 1Gb DRAM 개발에 성공했다. 이와 같은 의사결정에 따르는 투자규모는 얼마였고 의사결정의 주체는 누구인지 밝혔더라면 좋았겠다만, 저자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
말하자면 삼성 경영진은 업계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바로 다음 세대 제품의 공급량을 늘리는 공격적인 결정과 함께 그 다음 세대의 선행기술 개발에 더 막대한 투자를 하는 역공법을 취함으로서 시장에 대응한 것이다. 이전 세대 제품을 그냥 치킨게임의 희생물로 바치고 신규 투자로 바로 다음 세대 라인을 건설하는 전략으로 대응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긴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런 결정을 하지 못했을까? 저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해놓았으니 전체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삼성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도 모두가 반대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문제는 지배구조인가, 아니면 최종결정권자의 개인적인 성향인가.
저자가 서문에서 중국의 2020년 반도체 수입액은 3,500억 달러 규모로 같은 해 에너지 수입 규모의 두 배를 훌쩍 뛰어 넘는다고 서술한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음모론으로 치부해야 할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2008년 ‘오일 카드’를 쓴 제임스 노먼은 그 책 출간 당시 원유 가격이 100달러를 넘은 것은 미국이 중국 에너지 비용을 겨냥해 세운 전략이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유 가격을 올리는 것이 중국의 성장을 주저앉힐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도체 수입액이 그 두 배를 넘었다니, 반도체가 제2의 원유라는 저자의 주장은 주장을 넘어서는 팩트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원유를 뛰어 넘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중국에 대한 서술한 것 중 미국의 대 중국 제제 이후의 상황이 흥미로웠다. 저자는 세계 흐름에서 벗어난 상황을 갈라파고스로 은유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 모두 갈라파고스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같은 갈라파고스라고 해도 두 나라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서술한다. 일본은 변화가 늦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것을 만회할 외부 기술을 도입할 수 있지만 중국은 제제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제제를 버티기 위해 자국산 기술로 산업을 이어갈 경우 갈라파고스 경향을 더욱 심해지고, 기술 제제 국면이 풀리더라도 그간 쏟아 부은 매몰비용이 너무 커질 것이기 때문에 외부 기술을 도입해 그 격차를 다시 메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세계 경제가 본격적으로 글로벌화 된 이후 지금까지 기술이나 시장이 갈라파고스가 된 경우는 대부분 망하는 방향으로 결론 났다고 오금을 박는다.
그런데 일본과 달리 국가 주도로 자금을 무한정 쏟아 부을 수 있고 국가가 나서서 정책을 초법적으로 추진하는 중국도 그 사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십 수 년 전에 사우디에 부임했을 때 몇 가지 기대를 건 사업이 있었다. 고속철도와 원자력발전소였다. 우리 회사가 국내에서 가장 먼저 고속철도를 설계했고, 한국의 원전 건설경험은 어느 국가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우디로 나갈 무렵 이미 중국은 전 국토를 고속철도로 까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몇 년 가지 못해 설계비는 물론이고 설계실적도 우리가 쫓아가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고속철도 설계는 입도 떼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원전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이야 워낙 정치적인 것이고 안전성도 중요한 고려 요소이니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하겠다.
언젠가 북경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공사현장을 보고 혀를 찬 일이 있었다. 우리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우리도 예전에 그와 다르지 않았는데 이런 수준까지 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면서 양적성장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에 질적성장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했던 대로 중국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우리 턱 밑에까지 쫓아왔거나 우리를 넘어섰다.
뒷장으로 가다 보니 저자도 이미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자도 “중국의 발전 속도는 무섭다. 비메모리 반도체 뿐 아니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과점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도 역시 무서운 기세로 따라오고 있다. ... 일당독재와 무한한 자금이 열쇠가 될 수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로 무한한 자금 수혈은 어려워졌지만 기초과학의 발전이 놀랍다. 중국의 재료과학, 물리학, 화학 분야의 눈부신 약진이 무섭다. 이들 분야의 연구, 특히 신소재 개발 분야는 실제로 신물질 신공정 특허로 쉽게 연결된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수백 수천 개 반도체 소재ㆍ공정ㆍ소자 관련 기업이 인력과 자본을 갈아 넣을 경우 답이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랬을 것이다. 그 시장을 저자처럼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그 상황을 짐작하지 못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저자가 뒷부분에서 그에 대한 해법을 여러 각도로 제시해놓기는 했지만, 사정을 모르니 따라가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 건성으로 보아 넘겼다. 아마 거기에 저자가 염려한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머리 아프게 읽었지만 공들인 만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대중을 대상으로 발간한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아니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문적이다. 그래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 스스로를 용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글을 그냥 묵혀버렸으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러니 이 책이 나오도록 권유한 강양구 기자나 이 책을 출간한 뿌리와이파리 정종주 대표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을 읽을 용기를 불어넣어준 팟캐스트 방송 ‘책걸상’에도 감사함을 전한다. 진행자가 청취자 수준에 맞추느라 일부러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지 잘 안다. 그러니 질문 수준을 진행자 눈높이에 맞췄다는 것은 흉이 아니라 상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