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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21. 2023

<소설> 금수회의록

안국선

송창현 엮음

넥서스

2018년 7월 20일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국어시간에 배운 소설이 제법 많다. 등장인물도 알고 줄거리도 알고 그 소설이 갖는 의미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정작 읽은 것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언젠가 돈키호테를 읽겠다고 주문을 해서 받아보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다. 러시아 소설은 한 문단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서 읽다가 그만 둔 게 여러 권이다.


올해는 틈나는 대로 소설을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어렸을 때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살면서도 꾸준히 책을 사주셨던 부모님 때문에 어지간한 단편은 읽었지 싶다. 당시 읽은 소설이 해방 전후 문인의 작품이었으니 그 이후로는 읽은 것이 거의 없고, 외국의 명작소설은 아이들 읽기 좋게 줄거리 위주로 새로 편집한 책이 전부였다. 그때 건너뛰어 빈칸으로 남은 것들을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메워가려 한다.


책을 고르다가 ‘금수회의록’에 눈길이 멈췄다. 한 세기 전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비틀었는지 궁금했다. 금수만도 못하다는 것이 큰 욕인 세상에서 금수들은 인간을 어떻게 흉보았을까.


금수회의록


금수세상만도 못한 인간세상을 한탄하던 화자가 꿈을 꾸다가 금수회의소에 이른다. ‘인류를 논박할 일’을 의논하기 위해 길짐승ㆍ날짐승ㆍ버러지ㆍ물고기에, 풀이며 나무며 돌까지 다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 “패악한 일이 있으면 천히 여겨 금수 같은 행위라 하며, 사람이 만일 어리석고 하는 일이 없으면 초목같이 아무 생각도 없는 물건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 모습을 본 화자는 “금수와 초목은 천하고 사람은 귀하며, 금수와 초목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사람은 신령하거늘, 금수와 초목이 도리어 사람의 무도 패덕함을 공격하려 하니 괴상하고 부끄럽고 절통”해 한다.


모여든 금수와 초목은 “사람 된 자의 책임을 의논하여 분명히 할 일과, 사람의 행위를 들어서 옳고 그름을 가릴 일과, 지금 세상사람 중에 인류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조사”하기 위해 회의를 시작한다.


먼저 까마귀가 나선다. “우리는 아침 일찍 해 뜨기 전에 집을 떠나서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여 봉양도 하고,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집도 짓고, 곡식에 해 되는 버러지도 잡아서 하느님 뜻을 받들다가 저녁이 되면 반드시 내 집으로 돌아가되 나가고 돌아올 때 일정한 시간을 어기지 않건마는, 사람들은 점심때까지 자빠져서 잠을 자고, 저희 부모가 진지를 잡수었는지 처자가 기다리는지 모르고 쏘다니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 까마귀 족속만 하리오.”라고 일갈하며 그래서 “우리가 사람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을 까닭이 없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여우가 이어받는다. “사람들이 옛적부터 우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요망한 것이라 간사한 것이라 하여 저희들 중에도 요망하든지 간사한 자를 보면 여우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우리가 그 더럽고 괴이한 이름을 듣고 있으나 우리는 참 요망하고 간사한 것이 아니요, 정말 요망하고 간사한 것은 사람이오.” 그래서 사람이 하는 짓을 보면 말하는 자기 입이 더러워진다며 침을 퉤퉤 뱉는다. 자기는 그렇게 간사하지도 않고, 세상사람 말대로 라면 세상에 여우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며 그래서 “만일 우리더러 사람 같다 하면 우리는 그 이름이 더러워서 아니 받겠다”고 선언한다.


개구리는 나서서 “우리 개구리 족속은 우물에 있으면 우물에 있는 분수를 지키고, 미나리 논에 있으면 미나리 논에 있는 분수를 지키고, 바다에 있으면 바다에 있는 분수를 지키는데” 그러면 분수모르고 날뛰는 사람보다 상등이 낫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물 속 개구리’라는 말이 못내 고까웠던 모양이리라. 그리고 점잖게 고관대작을 꾸짖는다. “사람들은 거만한 마음이 많아서 저희들이 천하제일이라고 자칭하지마는, 제 나라 일도 잘 모르면서 큰 소리를 탕탕하고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것이 우습습디다. 연전에 어느 대관이 외국 대관을 만나 수작하다가 그 대관이 ‘대감이 지금 내부대신으로 있으니 전국의 인구와 호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대감이 전에 탁지대신을 지냈으니 전국의 결총과 국고의 세입 세출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물으나 아무 대답도 못하더란다. 그래서 ‘대감이 이 나라에 나서 이 정부의 대신으로 이같이 모르니 귀국을 위하여 가석하다’라는 걱정을 들었다더라.” 오늘 칼럼으로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


벌도 나선다. “사람들이 우리 벌을 독한 사람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입에 꿀이 있고 배에 칼이 있다 (구밀복검, 口蜜腹劍)하나 우리 입의 꿀은 남을 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만드는 것이요, 우리 배의 칼은 남을 공연히 쏘거나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해치려 하는 때에 정당방위로 쓰는 칼이오. 사람같이 입으로는 꿀같이 말을 달게 하고 배에는 칼 같은 마음을 품은 우리가 아니오.”


게까지 나선다. “옛적에 포박자라는 사람이 우리 게 족속을 가리켜 창자가 없다하여 무장공자(無腸公子)라 하였으니 대단히 무례한 말이로다. 그래, 우리는 창자가 없고 사람은 창자가 있소. 시방 세상사는 사람 중에 옳은 창자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소?” 그렇게 묻고 자기가 대답한다. 사람의 창자는 참 썩고 흐리고 더러우며, 의복은 자르르 흐르게 입어서 외양은 좋아도 다 가죽만 사람이니 그 속에는 똥밖에 아무 것도 없단다. 그러고 나서 마치 오늘 아침 신문이라도 본 양으로 “지금 정치하는 이들을 보면 깨끗한 창자라고는 아마 몇 개 없으리다. 신문에 그렇게 나고 사회에서 그렇게 시비하고 백성이 그렇게 원망하고 외국 사람이 그렇게 욕들을 하여도 모른 체하니 이것이 창자 있는 사람들이오?”이라며 “지금 사람들을 보면 그 창자가 다 썩어서 미구에 창자 있는 사람은 한 개도 없이 다 무장공자가 될 것이니, 이다음에는 사람더러 무장공자라고 불러야 옳겠소”라고 말을 맺는다.


이어서 파리, 호랑이, 원앙이 나서고 그렇게 회의가 끝난다. 화자는 자기가 당한 수모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한다.


“오늘날로 보면 제일 악하고 제일 흉괴하고 제일 음란하고 제일 간사하고 제일 더럽고 제일 어리석은 것이 사람이로다. 까마귀처럼 효도할 줄 모르고, 개구리처럼 분수를 지킬 줄도 모르고, 여우보다도 간사하고, 호랑이보다도 포악하고, 벌과 같이 정직하지도 못하고, 파리같이 동포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창자 없는 일은 게보다 심하고, 부장한 행실은 원앙새가 부끄럽도다.”


부끄러워할 줄 아니 그래도 사람구실은 했다. 화자는 부끄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행스럽게도 나름의 처방을 내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여러 짐승이 연설할 때 나는 사람을 위하여 변명 연설을 하리라 하고 몇 번이나 생각해본즉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가 없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하느님이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니, 사람들이 악한 일을 많이 하였을지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 길이 있다 하였으니 이 세상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는 깊이깊이 생각하시오.”


옳다.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써놓고 나니 나도 웃긴다.


금수회의 인류공격


동물들을 통해 인간사회와 모순과 비리를 꼬집은 풍자소설이자 우화소설인 이 작품은 발표되고 꽤나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08년 황성서적조합에서 출간한 다음해에 언론출판규제법에 의해 금서 딱지가 붙는다.


해방 되고 나서 신소설 중에서 가장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아 열 종이 넘는 교과서 수록이 되었단다. 그 이유가 단지 문학적 가치 때문이었을까. 대놓고 비판하기 껄끄러우니 이렇게 에둘러 엿을 먹였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후에 이 소설에 대한 표절시비가 일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4년 일본 소설가인 사토 구라타노가 쓴 <금수회의 인류공격>의 번안 작품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평론가 중에 몇몇은 그 소설의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번안 작품으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내용이 절반 이상 같고, 등장한 동물들도 같고, 더구나 삽화도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니 아니라는 주장이 미덥지 못하다. 표절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번안 작품이라고 대접해주는 것만 해도 어디냐.


검색하다 보니 이 소설 전문을 실어놓은 곳도 있더라.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319


이 소설집에는 안국선의 <공진회>와 단재 신채호의 <꿈하늘>도 함께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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