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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1. 2023

<소설> 동물농장

조지 오웰

도정일

민음사

1998년 8월 5일    

 

누구나 줄거리를 알 만큼 유명한 소설 중에서 읽은 건 정작 몇 권 되지 않는다. 줄거리 주워들은 것을 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한 해 몇 권씩이라도 읽기로 했다.   

  

귀국하고 나서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요즘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있는데,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나도 읽었겠거니 했다. 착각이었고.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모임에서 그저 모르겠더라는 말만 하고 왔다. 그러고 보니 이름난 소설 중에 제대로 읽은 게 별로 없다. 몇 년 전에는 <돈키호테>를 사놓고 천 쪽 가까이 되는 분량에 질려 앞에 몇 쪽 읽다 말았다.     


<1984>는 다시 정신 차려 읽기로 하고, 일단 분량이 작아 만만해 보이는 <동물농장>을 집어 들었다. 저자인 조지 오웰은 2차 대전 무렵 활약한 영국의 언론인이기도 한데, 장르에 상관없이 언제나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계급의식과 전체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풍자하는 것도 탁월하고.     


“존스 농장에 살던 동물들이 가혹한 생활에 못 이겨 주인을 쫓아내고 직접 농장을 운영하지만, 결국은 혁명을 주도했던 권력층의 독재로 농장이 부패해 버린다.”     


줄거리가 독창적이기는 해도 글의 구조가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다. 우화처럼 써놓았으니 읽기도 어려울 것이 없다. 게다가 분량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읽으면서 문득문득 멈춰서야 해서 몇 번에 나눠 읽었다. 그 상황이 지금 우리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저곳에 저자인 조지 오웰이 날카로운 정치풍자로 이름났었다는 설명도 여럿 올라와 있고, 어딘가에는 이 소설의 상황과 1945년 발표 당시 레닌과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활약하던 소련의 상황과 1:1로 대비해놓은 것도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겪지 않은 그 시대보다 우리 정치상황이 더 실감나게 비교되었다.     


“사람에게 착취당하던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농장주인을 내쫓고 주인 이름을 딴 ‘메이너 농장’을 ‘동물농장’으로 바꾼다. 힘을 모아 규칙을 만들고 각자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한 결과 동물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행복’했다. 먹을 것도 늘어나고 경험해보지 못한 여가도 누리게 된다. 지도자가 ‘학습’을 이끌고 각종 ‘위원회’를 만든다. 그런 지도자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난다. 사사건건 상대 의견을 반박하지만, 자기네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순식간에 ‘완전합의’에 이른다. 농장을 되찾으러 온 주인을 물리치고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는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꾀를 피우는 동물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그런 중에도 동물 대부분은 그해 내내 노예처럼 일한다. 노동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이 그들 자신과 후손을 위한 일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지도자는 처음 만든 규칙에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고 되어 있는데도 이전 농장주인의 집에 들어가 침대에서 잔다. 그리고 이 규칙을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이불을 깔고> 자면 안 된다’고 고친다. 이들이 그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이의를 제기하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던 규칙을 ‘어떤 동물도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고친다. 반항하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보고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고 되어 있던 당초 규칙을 거론하며 반발하자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고 고친다. 나중에는 규칙을 모두 없애고 당초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규칙을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것으로 고친 것 하나만 남겨놓는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빗대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때 상황을 그저 역사로만 알고 있으니 실감나게 다가올 리가 있겠는가. 그것보다는 저자가 최근에 한국에 다녀간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건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 정치 상황과 잘 들어맞았다. 그래서 사건 하나가 끝날 때마다 대응되는 우리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누군가 소설의 상황과 소설 발표 당시의 상황을 1:1로 대응시켜 놓은 것처럼 우리 상황을 맞춰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다만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대다수의 동물들이 언제 어떤 행동을 해야 했을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임계점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투쟁에 함께 목숨을 걸었던 동지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고, 지배자는 당초 타도의 대상이었던 농장주인과 구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간 것이다.     


어쩌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던 시점이 바로 이때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존경받는 어미 말 클로버가 공개 재판과 공개 처형으로 농장에 피 냄새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짓던 그 순간이 말이다.   

  

“오늘 있었던 공포와 살육의 장면은 늙은 메이저가 그들에게 반란을 사주했던 그날 밤 그들이 꿈꾸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 그녀를 비롯해서 농장의 동물들이 바랐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다. 허리가 휘게 일한 것도 이런 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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