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
와이즈맵
2022년 10월 15일
정보가 귀할 때는 사실 여부를 판단할만한 정보가 부족해서 한 번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은 잘못 알려졌더라도 오래지 않아 바로 잡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 속에 오히려 사실을 가리는 일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잘못 알려진 사실이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버린 전문가의 입에서 나왔을 때, 대중의 욕구와 감정에 부합할 때 오히려 더 힘을 얻고 차츰 진실이 되어간다. 저자는 이렇게 잘못 알려진 사실이 진실이 되어버린 것을 괴담이라고 정의한다.
괴담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극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극적이고 감동적이어서 대중의 욕구와 감정에 부합하는 것일 수 있고, 동시에 대중의 욕구와 감정에 부합하고자 극적이고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진실은 밋밋해 재미가 없다. 극적이지도 않다. 더구나 정보의 홍수 속에 묻혀 있으면 그것이 진실인줄 알아채는 것도 어렵다. 저자는 역사에 관련한 괴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쓰면서 괴담이 힘을 얻는 이유를 “큰 거짓말을 ‘반복’하면 대중은 결국 믿게 된다”는 괴벨스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 극적이고 감동적인 내용이 반복되기까지 하면 꼼짝없이 진실이 된다는 말이다.
역사에 관한 기사를 오랫동안 써오고 있는 저자 박종인 기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괴담 열여섯 가지를 정리해 이를 역사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반박해나가고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광화문 괴담>이라는 제목처럼 경복궁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세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명산대천에 쇠말뚝을 박아서 땅의 기를 끊는 풍수 침략을 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전해졌다. 그래서 산속 깊은 곳에 박힌 쇠말뚝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이 쇠말뚝은 위험한 등산로에 난간과 계단을 만들이 위해 박아 넣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되풀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1995년까지만 해도 광복 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로 쇠말뚝 제거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최근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업에 비하면 애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게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고, 나도 그렇게 알아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사료도 없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거나 한양이 철저하게 실용적인 기준으로 설계되었다는 사료가 넘친다고 말한다. 그동안 알려진 이에 관련한 괴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양 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하륜 사이에서 벌어진 풍수지리 논쟁의 결과로 결정되었다. 선현들이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한 풍수지리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삼각산과 관악산을 잇는 직선 위에 경복궁을 축으로 놓고 그 앞에 육조거리를 두어 남대문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는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근정전 앞에 총독부 건물을 태평로 축에 맞추어 건설함으로서 이 축을 차단했고 축의 방향도 틀어버렸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태종실록(1417년)에 태종이 어전회의에서 “천도할 때 하륜이 참서를 믿고 도읍을 무악으로 하고자 했으나 나는 믿지 않고 한성으로 도읍을 정했다”고 언급하면서 참서를 불살라버릴 것을 지시했다. 또한 태조실록(1394년, 1404년)에도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며, 큰 비용이 드는 토목사업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한성을 선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하륜이 풍수지리에 대해 논쟁할 때 북한산-북악산-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백악주산론이 근거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저자는 백악주산론 또한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한 지도를 보면 실제로 북한산-북악산-관악산은 정확하게 일직선에 놓여있다. 하지만 경복궁도 그렇고 육조거리도 이에서 벗어나 있다. 1907년에 작선된 육조거리의 실측도면을 보면 육조거리가 현재 세종대로와 일치할 뿐 아니라 광화문 앞에서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일제가 일부러 육조거리 축을 틀어놓은 게 아니라 워낙 틀어져 있던 육조거리를 그대로 확장했다는 것이다. 2천 년대 들어 본격화된 발굴조사 결과 건축가들이 주장한 육조거리 위치에서 많은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그곳이 육조거리였다면 아무런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어야 함에도.
풍수지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같은 위치에서 괴담 때문에 엄청난 낭비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광화문 앞 월대 복원공사이다. 월대는 세종 때 조성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사라졌으나 1867년 경복궁 복원 당시 광화문과 함께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광화문 앞에서 백성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월대를 사용하였으며, 그래서 왕도정치와 시민주권을 연결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복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세종 때 월대가 조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세종실록에는 예조판서가 월대를 조성하자는 건의를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을 쓰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 보고서에서 “공사를 금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월대를 “만들었다”고 추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농사철이 지나고 나서 이를 윤허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후에도 그런 사실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각종 기록과 그림에도 월대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만 투입되는 예산이 물경 1,068억 원이다.
2017년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열린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식 때 우리나라 대통령이 축하영상 메시지를 보냈는데, 거기서 대통령이 “호치민 주석의 애독서가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언급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뜻밖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이 괴담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순서는 1992년에 발간된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 1993년에 발간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994년 고은의 경향신문 인터뷰, 2004년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의 홈페이지 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애독서에서 필독서로, 필독서에서 다산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는 괴담으로 살이 붙고 뼈가 자랐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된 <박헌영 평전>에서 저자 안재성은 박헌영과 호치민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 함께 다녔고 그때 박헌영이 호치민에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가 된 호치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위에 열거한 주장 중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박헌영과 호치민이 모스크바에 체류한 기간이 겹치지 않았으니 만날 수도, <목민심서>를 선물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주장도 그를 뒷받침할만한 자료가 없을 뿐 아니라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이 추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주장을 거둬들였다. 호치민 박물관에 그런 책이 전시되어 있지도 않은데도 박물관장은 그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정약용이 태어난 경기도 남양주시는 베트남 빈 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10억 원을 들여 베트남 빈 시에 ‘남양주다산로’를 개통했다. 말하자면 괴담의 피해자인 셈인데, 저자는 오히려 그들을 괴담에 편승한 가해자라고 판단한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치적에 방해될까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면암 최익현은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1906년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일본 곡식은 결코 먹을 수 없다며 단식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공로로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함께 대마도에 갇혔던 제자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서는 최익현이 관을 벗고 경례하라는 일본군 대대장의 요구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단식을 한 일이 있었지만 오해가 풀려 사흘 만에 단식을 풀었고 이후에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일병합조약을 앞두고 고종은 일본 모르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에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한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준이 격분해 회의장에서 할복자살했고, 그래서 지금도 그를 열사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상태여서 일본이 이를 근거로 밀사들의 회의장 접근 자체를 봉쇄해달라고 요청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밀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랬으니 이준 열사가 회의장에서 할복자살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인근에 있는 다른 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위종이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지만 이준 열사는 당시 지병이 도져 그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며, 며칠 후 지병이 악화돼 호텔방에서 사망한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을사오적을 떠올린다. 물론 그들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반해 고종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비운의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조선을 팔아넘긴 중심인물을 을사오적보다 오히려 고종이라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 그 느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아는 게 없다. 그러니 이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고 대신 저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 몇 가지를 열거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으려 한다.
“고종은 을사조약을 반대한 의정부 참정 한규설을 파면하고 조약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영의정에 해당하는 참정대신에 임명한다. 또한 을사오적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크게 벌릴 일이 아니니 요량해서 처분하겠다’는 답을 내리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고종은 1904년 자신과 두 아들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18만 엔을 일본에 기부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30만 엔을 답례로 받는다. 지금 30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이때 윤비도 1만 엔, 황태자와 황태자비 또한 각각 5천 엔을 받는다. 이런 내용은 영국 공사관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이 문서에는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때 고종의 지분을 보장하며 향후 경의선의 지분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