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던 개릿
신민영 옮김
한겨레출판
2021년 5월 31일
몇 년 전에 재심이 한동안 화제에 올랐다. 이미 확정 판결이 나서 복역 중인 죄수가 다시 재판을 받고 혐의를 벗고 풀려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법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죄 짓지 않으면 그런 험한 꼴 겪지 않으려니 했는데, 죄를 짓지 않고도 징역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니 사법시스템이 회의를 넘어서 불신이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겪어보지 않은 일이니 수사나 재판 과정에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깡그리 파괴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 책의 저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검사나 판사들이 무고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는 건 비현실적인 꿈이라거나 무고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는 없다고 장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후반 들어 DNA 검사가 보급되고 나서 미국의 형사사법 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형사사법절차 개선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인 브랜던 개릿은 DNA 검사가 보급된 이후 결백이 증명된 오판 피해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재판기록, 진술조서, 재판부 의견, 재판 속기록을 뒤졌다. 그는 이 기록을 분석하면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DNA 검사가 보급되고 나서 이를 통해 결백을 입증한 첫 250명 중에는 강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171건으로 가장 많고 이후 강간살인 52건, 살인 22건이 뒤를 이었다. 재판 결과 250명 중 17명은 사형을, 80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50명 중 155명이 흑인이었고 20명은 히스패닉 1명은 아시아인이었으면 백인은 74명에 지나지 않았다. 소수인종이 70%가 넘었다는 것을 보면 오판에 편견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평균 13년을 감옥에서 억울하게 보내야했고 결백을 증명하기까지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범죄를 자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오판 피해자 250명 중 40명은 범죄를 자백해 그것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물론 폭력이나 고문으로 범인을 조작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 않은 한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어떻게 범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까지 세밀하게,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자백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오판의 첫 번째 이유로 오염된 자백을 든다. 경찰이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에게 현장 상황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용의자가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제 일을 기억해 봐요. 사진 보여줬잖아요. 분수 옆에. 우리가 어제 보여준 문이 거기 있었던 거 기억하잖아요”라고 물으며 현장 사진을 보여준 후 “바로 여깁니다”라는 용의자의 답변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용의자를 현장에 데려가 범죄의 세부적인 사항을 설명해주기도 하며,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적절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치중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찰이 자백을 위해 정교한 압박 전략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악의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의도 없이도 얼마든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용의자를 압박하는 동시에 자백하면 이익이 따를 것이라고 제안한다. 아울러 용의자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용의자가 저지른 범죄가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다거나, 좀 더 가벼운 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거나, 자백하면 선처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형이 더 무거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때때로 용의자에게 과학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던가, 공범이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을 악의적으로 하는 경찰이 없을 수는 없지만 경찰 대다수는 진범을 신문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경찰은 용의자가 진범이고 공공에 위험을 끼친다는 믿음으로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적으로 자백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신문과정을 녹화한 영상을 보면서 비로소 자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인식하기도 한다.”
수사는 경찰이 하지만 판결은 판사가 내린다. 그렇다면 자백이 강압에 의한 것은 아닌지, 오염된 것은 아닌지 살필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판사들은 자백을 배제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고 말한다. 자백이 구체적인 범죄 상황과 일치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고, 자백이 오염되었다거나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경찰이 극악한 비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날 경우에 예외적으로 자백을 배제할 뿐이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자백의 신빙성을 면밀히 조사해달라는 변호인의 요구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반대 증거가 분명한데도 오히려 자백을 인정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범인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세워놓고 목격자에게 범인을 지목하게 하기도 하는데, 한 사람을 놓고 범인인지 가부를 묻는 것을 쇼업(show up), 여러 사람을 놓고 범인을 찾게 하는 것을 라인업(line up)이라고 한다. 저자는 쇼업은 용의자가 누군지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건 직후 범행현장 근처에서 목격된 경우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하지만 그런데도 상당수의 경우에 쇼업이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라인업에서도 그 사람들 중에 전과자가 있다면서 범인을 지목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다 보니 강간 피해자의 증언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데, 저자는 강간 사건의 정황상 피해자가 가해자를 정확하게 인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설명한다. 강간이 일어나는 동안 피해자는 가해자의 손에 들린 무기에 신경이 곤두서있고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해자를 정확하게 목격하거나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250명의 오판 피해자 중 190명은 목격자가 범인을 잘못 지목한 결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에서 목격자들은 범인인 것을 확신했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확실치 않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지목하거나 가해자를 전혀 다르게 묘사했다. 하지만 경찰이 용의자 사진을 보여주면서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반복해 질문하면서 점차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유색인종이 오판 피해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인종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식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강간사건의 피해자가 백인이었다면 목격자가 착각을 일으킬 확률은 그만큼 늘어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과 같이 다인종이 모여 사는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다.
DNA 검사가 도입되기 전에는 주로 혈청이나 체모, 지문 같은 법의학 증거를 사용했다. 실제로 오판 사례 250건 중 혈청 116건, 체모 75건, 지문 20건이 판결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 중 혈청은 시료 혼합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체모나 지문 또는 치흔은 정확성이 낮아서 법의학 증거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법의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제시한 증거에 대해 확신이 없었거나 증거로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도 이런 결함 있는 증거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판사들이 증거보다 자백을 높게 평가했고, 변호인들의 법의학 지식이 부족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비용 때문에 판사들이 어지간해서는 증거분석을 허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오류 가능성을 심화시킨 것으로 판단한다. 증거 분석은 단순히 비용 문제만은 아니다. 분석 전문가를 찾는 것도 어렵고, 전문가를 찾는다고 해도 대체로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재판부의 의도에 반하는 분석은 맡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소속 기관에서 아예 민간 위탁을 금하기도 한다. 결국 증거를 분석하고 싶어도 맡길 곳도 없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 결함 있는 수사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일반인들에게 무죄 증거를 찾는다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판에 희생된 사람의 절대 다수가 흑인이나 히스패닉 같은 소수 인종이어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할 만한 형편도 되지 못한다. 거기에 수사기법에도 결함이 적지 않으니 오판의 피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DNA 검사가 도입되어 오판의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지고 억울한 피해자도 그만큼 낮아졌다. 하지만 DNA 검사결과 결백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즉각적인 조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에 앞서 DNA 검사에 대한 허가를 얻는 것도 쉬운 일도 아니다. 오판을 줄일 수 있는 결정적인 도구가 개발되었는데도 그 혜택을 입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분석의 대상이 된 250건은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한다. 판사가 DNA 검사 요청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증거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판사가 자신의 유죄판결을 확신하고 있을 경우 DNA 검사 요청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DNA 검사로 결백이 증명되었다 해서 즉각 풀려나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그런 경우 판사의 재심 명령이 있어야 재심절차가 시작된다. 주지사가 사면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역시 주지사 결정에 달린 것이어서 반드시 사면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사면이 이루어진다 해도 유죄판결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잔여 복역기간만 해당되어 풀려난 이후에도 전과기록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와 그로 인한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형사사법절차 개선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인 저자는 책 말미에 형사사법제도 개혁방안을 서술하고 있다. 형사절차 뿐 아니라 신문 절차, 범인 식별절차, 수감자 제보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