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by 박인식

知足常足 (2016.10.01)


노자는 도덕경 46장에서 지족지족상족(知足之足常足)이라고 했다. 족한 줄 알고 족한 마음으로 살면 항상 족하다는 것이다.


평생 열심히 살았고 그에 대한 대우에 아쉬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대우받은 값을 하며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겠다. 환갑을 넘기고도 일할 수 있는 요즘은 지족을 넘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산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물러날 때를 생각하면 아쉽고 때로는 두려운 마음도 든다. 물러나면 그 대우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으니 그에 맞춰 삶의 구조를 바꿔야 할 텐데, 그것 말고 달리 방법도 없고 그게 불가능할 리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아쉽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걸까? 지족하며 살았다는 게 착각이었고 말만 번지르르 할 뿐, 마음으로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예배자의 위치 (2016.10.01)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모든 예배자는 하나님을 향해 서는 것이 맞다. 요즘 예배 순서 맡은 이들이 회중을 내려 보듯 강단에 앉아있지 않고 순서가 되면 강단에 오르는 경우가 많던데, 이런 관점에서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내친 김에 설교를 제외한 모든 순서를 앞을 향하게 하면 어떨까? 하나님이 어디 앞쪽에만 계시기야 하겠나마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방향이 앞이니 기도도 앞을 향해서 하고 성가대 찬양도 앞을 향해서 하는 건 어떨까? 설교야 하나님 말씀을 회중에게 선포하는 것이니 회중을 향하는 것이 맞겠고. 성당에서 성가대가 뒤쪽에서 찬양 드리는 게 이런 까닭이 아닐까?


요즘 성가대가 회중을 마주하고 서서 찬양을 드리는데, 회중 앞에 서서 회중과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기도 하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다 든다.



증거와 선포 (2016.10.01)


개신교에서는 선교를 지상 최후의 명령이라고 믿고 그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 천주교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선교라는 말하는 대신 ‘증거와 선포’라고 말한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선교가 지닌 본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요즘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증거와 선포’라는 말이 이러한 오해를 없앨 수 있는 더 나은 표현이 아닌가 한다. 삶으로 말씀을 증명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게 어디 표현의 문제이기만 하겠나. 오해했으니 삶이 뒷받침 될 수 없고, 삶이 뒷받침 되지 않은 신앙이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다만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라는 질책이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김제동 (2016.10.07)


언젠가 회사 동호회 모임을 가진 곳에서 그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이미 꽤 명성을 얻었을 때였는데, 반색을 하며 다가가는 직장 동료 한 사람 한 사람 친절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의 유머가 보수적 성향을 가진 내게 때로 거북하지만 촌철살인의 맛이 있어서 호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최근 그가 사령관 부인에게 아주머니라 불렀다가 영창 다녀왔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놓고 소란이 일고 있다. 본인이 그에 대해 뚜렷하게 진위를 밝히고 있지 않는 가운데 며칠 전 어느 공연에서 “웃자는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다”고 했다. 웃자는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기는 하다.


그는 자신이 방위병일 때 근무시간 이후에 부대 행사에서 사회 본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탈법을 저질렀으니 자기 농담에 시비 걸 자격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 이에 대해 “물대포로 농민 죽인 경찰이 뭘 잘했다고 신호위반한 차를 잡느냐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체중이 무거워지면 살짝만 삐끗해도 발목이 나가는 수가 있다”고 애정 어린 충고를 보냈다.


진보는 변화를 추구하고 보수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수 역시 변화를 추구한다. 다만 그 속도가 변화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내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명분을 얻는데 더 치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의 정직성은 “물대포로 농민 죽인 경찰이 뭘 잘했다고 신호위반한 차를 잡느냐”는 식의 자기 정당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수가 극우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보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러니 “체중이 무거워지면 살짝만 삐끗해도 발목이 나가는 수 있다”는 애정 어린 충고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다이어트 (2016.10.11)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새벽에 잠잠히 앉아 내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음성에 귀 기울여보려 하지만, 밀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참 많이 빼앗기고 사는구나 싶다. 이참에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는 훈련을 해야겠다.


돌아보니 떨쳐버릴 게 그것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삶이 화려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놀랍고 걱정스럽다. 요즘 애쓴 보람이 있어 체중을 상당히 줄였고 덕분에 몸이 훨씬 가벼워져 의기양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이어트 해야 할 게 체중만이 아니다. 생각도 다이어트를 해야겠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겠나.



욕망의 끝 (2016.10.13)


새벽기도는 1분의 싸움이다. 좀 더 자고 싶은 욕망을 1분만 억누르면 되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만 그럴까. 모든 잘못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고, 욕망이 지속되는 시간이라는 게 몇 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 몇 분을 견디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고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사람을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성범죄를 일으키는 욕망도 지속시간이 불과 11분이라지 않나. 그 몇 분 때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서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애꿎은 피해자 (2016.10.17)


김영란법이 발효되고 나서 법 이름만큼이나 ‘애꿎은 피해자’라는 말이 기사에 많이 오른다.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서민들이 더 고단해지는 걸 안타깝게 여기는 말일 거라 믿는다.


그렇기는 해도 ‘애꿎은 피해자’라는 말은 적절하지도 않고 우리 잠재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말은 아닌가 싶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동안 고객들이 어떤 목적으로 매출을 올렸건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자기로서는 정직하게 땀 흘려 번 것이니 ‘애꿎은 피해자’라는 말 아닌가.


메뉴 고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비싼 음식점도 그렇고, 하룻밤 술값이 한 달 월급 훌쩍 넘는 술집은 또 어떤가. 우리가 언제부터 경조사에 십만 원이 훌쩍 넘는 화환을 그렇게 쉽게 보냈나.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게 아니니 그렇게 흥청망청 쓴 거 아닌가. 그런 거래가 이해관계 없이 일어나겠나. 옳지 않은 거래로 올린 매출이라면 이로 인해 매출이 줄더라도 감내해야 하지 않은가. 물론 당장 생계가 타격을 입으니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애꿎은 피해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생각이야 어떻게 하면 무슨 상관이 있겠나만, 스스로 ‘애꿎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어려움을 타개할 근본적인 방법을 찾기보다는 편법을 써서 상황을 모면하기에 급급할 것이니, 어렵게 맞은 국가 회생의 계기가 무위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구제 (2016.10.22)


아내가 속한 여전도회에서 구제금을 지급하는 문제로 회원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올 초에 그 가정에 구제금을 지급하기도 했고, 적지 않은 회원들이 그 가정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제금을 지급할지 말지, 지급한다면 얼마를 할지 오늘 결정한다고 했다.


아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결정 내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넉넉하지 않은 재정에 써야 할 곳도 많으니 돕는다고 해도 구제금이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 또한 올해 교회 재정을 맡고 있어 그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면 재정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으로 믿고 힘자라는 데까지 도와주기를 다시 권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몹시 부끄러웠다. 채워주실 걸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권할까.


조금 전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감당하는 게 힘에 부칠 만큼 돕기로 했단다. 감사한 일이다.



글쓰기 (2016.10.26)


이과 출신이기는 하지만 사업의 성과를 보고서로 내야 하다 보니 글 쓰는 일에 어지간히 이력이 붙기는 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자주 쓰고, 그러다 보니 글 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시간 나는 대로 남의 글을 읽고 짧은 글이라도 매일 거르지 않고 써보려고 한다.


보고서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 혼선의 여지가 없어야 하고 근거가 뚜렷해야 한다. 그래서 한 문장에 한 가지만 담는 단문을 선호한다. 복문으로 장황하게 풀어놓다 보면 논점을 놓치거나 읽는 이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달에 초점을 맞추니 형용사나 부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글이 건조하기 짝이 없다. 때로 글을 좀 더 부드럽고 멋지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도 않고, 이제는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생긴 대로 쓰기로 했다. 언젠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는데 박진감이 넘쳤다. 찬찬히 뜯어보니 문장이 짧고 단순할 뿐 아니라 형용사와 부사를 극히 절제하고 있었다.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넉넉히 모든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보였다.


요 며칠 대통령의 연설문 때문에 소란스럽다. 연설은 듣는 이들을 감동시키고 듣는 이들이 호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 글쓰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어려워 보인다. 그런 연설문에도 미사여구 없는 단문이 더 설득력 있는 걸 보면 글은 꾸미는 것보다 담는 내용과 군더더기 없는 전달방식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앞으로 담는 내용에 좀 더 치중하되 형식은 지금 그대로 담백함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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