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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07. 2023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바트 어만

박철현 번역

이제

2008년 9월 1일


몇 년 전에 김기흥 교수의 <역사적 예수>를 읽은 것을 계기로 성서비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바트 어만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고 하고, 다행이 그의 저서가 상당수 번역본으로 발간되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가고 있다. 번역본으로 발간된 그의 저서 일곱 권 가운데 네 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이에 앞서 읽은 <예수 왜곡의 역사>와 <성경 왜곡의 역사>를 통해 1) 신약성경이 처음부터 성경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2) 예수를 만났던 이들 중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었을 확률이 희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기록은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기록된 것이고, 3) 예수께서는 교리를 말씀하신 바가 없으며 그것은 초대 교회가 세워진 이후 만들어진 것이고, 4)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기록 가운데 일부가 정경화 과정에서 성경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약성경이 전해져 내려오던 수많은 기록 가운데 일부를 취사선택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선택한 이가 누구이고,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었으며, 선택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기준으로건, 어떤 이유에서건 선택이 되었다는 것은 승자의 결정일 수밖에 없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데, 그렇다면 성경 역시 선택할 권한을 가진 승자의 기록이 아닌가?


이 책은 이와 같이 성경을 선택하는 정경화(Canonization)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경으로 선택되지 못한 외경과 신뢰성을 의심받는 위서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열거한 외경은 복음서 16권, 행전 6권, 서신서 13권, 계시록 9권까지 총 44권에 이른다. 그리고 정경으로 선택된 성경이나 외경의 바탕이 되는 필사본은 무려 5,400종에 이른다. 정경이 완성된 후 정경을 선택한 이들은 반대자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위서와 외경은 이단인가?


위서는 위조한 문서이다. 내용을 위조한 것도 위서이지만,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문서를 작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할 경우 베드로가 썼다는 베드로후서도 바울이 썼다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도 스스로 밝힌 것과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이니 위서이다. 저자는 신약성경에 포함된 복음서들도 모두 익명으로 쓰였다가 나중에 평판이 높은 저술가로 알려진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의 이름을 땄다고 말한다. 고대에는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문서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평판 높은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데 왜 그 중 어느 것은 정경으로 선택되고 어느 것은 선택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대표적인 위서와 외경에 대해 정경에서 탈락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설명이 너무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이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건너뛰며 읽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정경으로 선택되지 못한 것은 모두 이단인가 하는 질문이 일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단(異端)’을 ‘정통 학설 또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벗어나는 주장’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통 교리를 벗어났다는 말은 정통 교리가 있을 때 성립한다. 그렇다면 정통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정통’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가르쳤으며 지금까지 신자들 대다수가 주장하는 바른 견해”라고 전제한다. 아울러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2~3세기 교회에 전했다는 정통 교리를 가르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며, 정통 교리는 초기 기독교보다 후기에 발전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고 말한다. 결국 ‘정통’은 없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단도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 참.


교리의 탄생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이나 외경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내용이 변화되며 시간이 갈수록 그 양상이 강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로마제국에게서 유대인에게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마가복음(AD 65~70)은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서로 똘똘 뭉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조금 후에 쓰인 마태복음(AD 80~85)에서는 빌라도가 손을 씻는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마태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누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말을 무려 세 번이나 되풀이한다. 복음서 중 가장 나중에 쓰인 요한복음(AD 90~95)에서도 빌라도가 자신의 무죄를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선언하고 끝까지 버티다 할 수 없이 유대인에게 예수를 넘겨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이후에 기록된 ‘베드로복음’이나 ‘빌라도의 항복’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결국 모든 기록은 구세주를 죽인 책임을 유대인에게 뒤집어씌우고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저자는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자 ‘하나님 아버지가 고난을 당한다’는 성부수난 견해가 등장하고, 그에 반대한 이들이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하나지만 표현상 셋으로 구별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 견해는 ‘권능으로 보면 하나님은 하나지만 기능으로 보면 셋으로 표현한다’는 주장을 거쳐 후기로 내려가면서 신학자들에 의해 좀 더 정교한 어휘를 사용하며 ‘삼위일체’ 이론으로 정비되었다.”


결국 어떤 의도에서였던 주장이 강화되면서 교리가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저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가 주류 집단이 자기들과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기독교 공동체들의 교리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라고 말한다. 교리는 이와 같이 자기주장을 보호하는 과정에서도 생겨나고 강화된다.


그동안 성서비평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성경은 기록된 것이 아니라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편집이라는 것은 편집자의 의도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편집자의 의도가 축적된 것 역시 교리로 이어진 것이다. 아래와 같은 저자의 설명은 편집과정에서 편집자의 의도가 개입된 것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이다.


“5,400편의 필사본을 비교한 결과 놀랍게도 어떤 두 사본도 동일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그 텍스트를 베껴 쓴 필사자들이 고쳐 썼기 때문이다. 대략 20~30만 곳이 다른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신약에 나오는 단어 총 숫자보다도 더 많다. 필사자들은 단순히 피로나 집중력의 부족, 혹은 서툰 솜씨 때문에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것은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정경 선택 과정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정통 교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예수나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교리는 승자의 주장과 의도가 축적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정도는 알아들었다. 그런데 정통이라는 것이 예수나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교리도 승자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한 것도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성서비평에 대한 책을 읽다가 급기야 정통이나 교리의 정당성이 무너지는 상황을 맞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단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닌가? 점입가경이다.


기독교의 정통성도 교리도 다 무너졌으니 그것에 뿌리를 둔 내 믿음도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데, 이상하리만치 내 믿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묵상하던 중에 사도 바울이 율법이 몽학선생이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어쩌면 내게 성경이 몽학선생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연이 쌓여가면서 내게 있어서 성경의 의미가 달라지고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써놓고 나서 보니 정말 그렇다. 비록 내 경험이 일천하지만 그에 비춰보면 성경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며칠 전 교우들과 차 마시다가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렀다. 한 교우가 그렇다면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을 섭리하신다는 것, 그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싶다. 문득 설교 말씀이 떠올랐다.


“그 믿음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며, 내 삶이 나를 넘어 다른 이웃에게 이어져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허튼 것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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