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럴드 웡 수
김보영 번역
다봄교육
2022년 12월 27일
온라인 이곳저곳에 <더 글로리>가 넘쳐난다. 드라마로, 분석기사로, 칼럼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회문제로 떠오른 학교폭력이 거의 절정에 이른 느낌마저 든다. 어제는 대담프로에 학교폭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가 출연했다. 가해학생은 하나 같이 그저 장난으로 한 일이고 자기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게 논다고 이야기한단다.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편견과 그 결과로 드러나는 차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백인 대부분은 스스로를 선량하고 도덕적이고 예의바른 인간으로 여기며 자신은 결코 인종을 근거로 타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무의식적이고 편향적인 생각이 차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양상은 인종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색인이 처한 상황을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미국에서 소수집단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유색인의 66%가 심각하다고 응답한 반면 백인 중 심각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39%에 불과하다. 학교폭력을 그저 장난 정도로 여기는 가해학생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피해도 학교폭력의 비해와 다를 바 없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중국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어린 시절 동양인이라서 놀림을 받던 기억 때문에 인간행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런 환경으로 그는 다문화 연구 분야의 가장 중요한 학자가 되었다.
저자는 편견과 차별을 ‘미세공격(micro aggression)’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미세(micro)’는 작거나 무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공격행위가 개인과 개인 사이, 즉 미시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며 ‘공격(aggression)’은 누군가를 해치려는 물리적 행동을 뜻한다.
저자는 미세공격은 의식적으로나 고의적으로 인종, 성별, 성적지향에 따른 편향된 태도, 신념, 행동을 환경 단서, 언어, 행동을 통해 소외집단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소외집단이 대접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그 사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인종차별에 여기 해당하는데, 실제로 유색인들은 애매한 미세공격보다는 차라리 누가 봐도 거대공격이라고 여길만한 행동에 더 잘 대처한다. 공공연한 인종차별보다 모호한 인종차별을 더 힘들어한다는 말이다.
또한 미세공격은 이와 같은 언어적, 물리적 행동뿐 아니라 환경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 저자는 많은 유색인 학생들이 오래전부터 캠퍼스 분위기가 배타적, 적대적, 비수용적이라는 불만을 토로해온 어느 대학의 사례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 대학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과대학 학장과 부서장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참석한 교수 가운데 유색인은 한 명도 없었고 여성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유색인 학생들은 이런 환경을 “당신과 같은 부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 학생은 졸업하기 힘들 것이고 교수라면 종신직을 얻거나 승진하기 힘들 것이다. 성공을 원한다면 우리 방식에 순응하고 동화되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굳이 언어적, 물리적 폭력 사용하지 않더라도 환경만으로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욱 분명히 메시지를 전달한다. 만약 기업 회의실에 걸린 사진 속의 전임 CEO와 이사들이 모두 남성이라면 그곳에 들어가는 여성들은 여성이 경영진으로 성공할 수 없고 견고한 유리 천장이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않겠나?
미세공격으로 인해 피해자가 입는 영향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 학교폭력의 폐해와 다를 바 없다. 저자는 미세공격은 매일같이 흔하게 일어나는데, 이것이 축적되면 피해자는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없어지고, 수면시간에 영향을 받고, 신체건강에 문제가 일어나고, 기대수명을 단축되고, 자살충동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거대공격이 아니라고 해도, 의도한 것도 아니고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을 받은 유색인은 만성적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생리적 반응으로 관상동맥심질환, 당뇨병, 고혈압, 알레르기, 천식과 같은 특정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더욱이 이와 같은 질병의 발병 뿐 아니라 질병의 경과에도 영향을 끼쳐 면역체계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질병감수성을 높이고, 그러니 당연히 질병의 진행속도도 높아진다. 결국 ‘미세공격’의 영향은 “결코 미세하지 않으며 소외집단 구성원들의 심리에 중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해자들은 그것이 가해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런 것을 지적하면 당신은 왜 그렇게 과민 하냐 거나 쌍방의 책임인데 가해자에게만 책임을 돌린다고 항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구분에 따르면 피해는 피해자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가해자 역시 피해를 입는다고 설명한다. 가진 힘이 클수록 현실을 정확히 지각하지 못하고, 현실 지각이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흑인이 우버 택시를 기다리거나 스타벅스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백인이 911에 신고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더라면 쓸데없이 공포에 사로잡혀 911에 신고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왜곡된 지각(편견) 때문에 괜히 지레 겁을 먹고 없는 공포에 떨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른 인종의 친구와 사귀거나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거나 다양성을 배우지 못하며, 이로 인해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협소한 세계관을 갖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기는 한데 저자의 이 주장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해자 역시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해자가 입는 피해와 비교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그때 튄 피가 자기 옷에 묻었으니 자기 역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피해자는 가해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피해를 입어도 피해를 제대로 밝히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한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나 큰 경우에도 그렇다. 저자는 피해자가 이런 미세공격을 받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미세공격이 일어났는지 판단하기 애매하다.
2) 최선의 대응방법을 알지 못한다.
3) 대응하기도 전에 상황이 순식간에 끝난다.
4)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한다.
5)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6) 상대방의 권력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예시하고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먼저 탔던 백인 여성이 갑자기 경계하며 지갑을 꽉 움켜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때 여성은 ‘당신은 위험한 범죄자’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이때 피해자는 단순히 ‘걱정 마세요. 제가 흑인인 건 맞지만 흑인이라고 해서 위험한 건 아니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고, 옆에서 ‘진정하세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긴장하시지요? 우리 모두 그냥 출근하는 거잖아요’라고 개입할 수 있다.”
“가해자에게 무슨 뜻으로 한 행동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정확히 무슨 뜻이지요?’라던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십니까?’라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 방금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말한 그 사람에게 다시 설명할 수도 있다. ‘여자 직원은 출산휴가를 쓸 거니까 남자 직원보다 덜 믿음직하다는 이야기로군요.’ (이 방법은 단순히 가해자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왜 지금까지 편견과 차별에 대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